WWDC, 애플은 할 말이 많았어요

WWDC 2015 취재에서 돌아온 후, 시차적응을 못 해서 아침에 어찌 출근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니 지하철, 잠깐 필름이 끊기고 나니 땀을 흘리며 사무실에 서 있었다. 납치당한 기분이다. 커피를 사발로 마시고 나니 뇌가 재부팅된다. 보통 내 머릿속 PC 부팅음은 ‘빰~!’인데, 오늘은 부팅이 느려서 ‘따라라 따단!’이라는 부팅음이 흘러나온다. (소리를 글로 담으려니 어렵다. 맥과 윈도우의 부팅음을 재현해봤는데 이해가 되셨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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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차분히 부팅을 마친 후, 샌프란시스코 모스콘 웨스트 센터에서의 추억(?)을 되새김질해본다. 2시간 남짓한 키노트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혹자는 혁신이 없는 심심한 행사였다고 평가했는데, 현장에서 직접 봤기 때문일까. 각각의 이야기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나 역시 그냥 짤막한 기사로만 키노트 내용을 접했으면, 별거 없다고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하드웨어도 없었고, 드라마틱한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 속내를 잘 살펴보면 ‘의외의 변화’가 많았다. 내 마음을 정리하는 셈 치고, 앞선 기사에서 못한 얘기들을 장황하게 떠들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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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WWDC 2015  키노트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고르라면? 아아, 당연히 그 순간이다. 크레이그 페더리기가 스위프트2를 오픈소스로 공개한다고 말하던 그 순간 말이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야 심드렁했다. 아아, 그래? 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데, 순식간에 거대한 행사장 안이 함성으로 가득 찼다. 깜짝 놀랐다. 개발자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손바닥이 부서질 듯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군부대에 EXID가 공연을 가면 이 정도 함성이 나오지 않을까. 세상을 모두 얻은 듯 기뻐하는 개발자들을 보며, 그제야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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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2014년에 발표한 스위프트는 iOS와 OS X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프로그래밍 언어다. 하나의 언어로 두 가지 OS 개발을 모두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며, 이번에 스위프트2를 공개하며 생산성과 성능이 대폭 향상됐다고 한다. 컴파일러와 표준라이브러리가 오픈소스로 제공되며 iOS, OS X는 물론 리눅스에서도 사용 가능하다. 올해 말 정도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그간 폐쇄적인 정책을 고수했던 애플이 이런 액션을 취하니, 개발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반가운 소식이다. 개발자들의 참여가 많아지면 자연히 애플의 생태계를 넓히는 기회가 될 것은 물론이다. 구글과의 규모 싸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은 내 착각이 아니겠지. 어쨌든, 개발자 여러분이 기쁘다면 나도 기쁘다. 애플의 이런 적절한 쇼맨십이 기가 막힌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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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트 중간 중간 내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포인트가 있다. 다들 코를 킁킁 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익숙한 안드로이드의 향기가 났기 때문. iOS의 매력은 사용자의 역할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폐쇄적이지만 견고한 틀을 제공하고 이렇게 말한다.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귀찮게 스스로 뭘 바꾸려고 하지 마, 내가 최선의 방법을 제공할게” 그 단호함에 매료된 iOS 사용자들은 안드로이드의 솔깃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애플의 말을 들었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와이파이 하나 켜자고 설정 메뉴로 들어가야 했던 불편한 시절에도, 나는 편리한 안드로이드의 조잡함보다 iOS의 깔끔한 불편함이 좋았던 사람이다.

그런 애플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런지 오래됐지만) 이번 iOS9에는 애플이 멀리하던 멀티태스킹 기능까지 들어가 버렸다. 기존에 멀티태스킹에 인색했던 이유에는 메모리의 문제도 있을 것이고, 화면 크기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갤럭시 노트 엣지의 팝업창 기능을 보라. 최대 5개의 팝업창을 띄울 수 있다더라. 흡사 PC 수준의 멀티태스킹이 아닌가. 안드로이드(특히 갤럭시)가 강력한 스펙으로 손안의 PC를 지향하는 동안, 애플은 철저히 단순화되고 직관화된 모바일 UI를 만드는데 집중했다.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 지론은 폰에게는 폰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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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S9이 뒤늦게 아이패드의 화면분할 기능을 가지고 나타났다. 기존 멀티태스킹 조작을 완전히 바꾼 슬라이드 오버와 동시에 두 개의 앱을 한 화면에서 구동할 수 있는 스플릿 뷰 기능. 게다가 앞서 언급했던 갤럭시 시리즈의 팝업 플레이와 닮은 화면 속 화면(다른 작업을 하며 영상 플레이 창을 따로 띄워놓을 수 있다) 기능까지!

사실은 아닌 척하면서도 이 기능에 대한 니즈가 있었다. 한 화면에서 두 작업을 한다는 것은 결국 생산성 향상을 얘기한다. 같은 기기로 작업할 수 있는 범위나 속도가 확대된다는 뜻이다. 아이패드의 작업성을 더 강조하겠다는 얘기다. 아이패드로 얼마나 많은 창의적 작업이 가능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 업무용으로의 가능성까지 뽐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왼쪽 창에서 편집한 사진을 오른쪽 메일 창으로 끌어와 전송하는 그런 쾌적함? 여튼, 아이폰6 시리즈가 훌쩍 몸집을 키우며 아이패드 제품군이 약간의 팀킬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니 전체적으로 아이패드를 띄워주는 분위기다. 나쁘지 않다. 아이패드 에어2는 이전 제품들보다 월등한 성능을 제공하는지라, 가끔 노트북 대신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기능을 덧붙여준다면 더더욱 맹활약할 수 있으리라. 좋은 수였다.

결과는 좋지만 이런 느낌이 든다. 센스 있는 예술가 타입이면서 은근히 공부도 잘하던 학생A가 갑자기 서울대에 가야겠다며 고액과외를 시작한…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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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 X 엘 캐피탄에서도 윈도우와 닮은 기능이 눈에 띄었는데, 가장 적절한 시기에 한 가지씩 선물로 주기 위해 아껴두었나 싶을 정도다. 키노트 초반에 공개했던 사파리 핀 사이트 기능만 봐도,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크롬에선 기본이 아니던가. 애플은 얄미울 만큼 타이밍의 귀재다. 대부분의 경우 섣불리 덤벼드는 법이 없고, 좋은 게 왜 좋은지 증명될 때까지 기다리곤 한다. 이번에도 좋은 것들을 모아 iOS와 OS X를 정비했다. 의아한 면이 없지 않지만, 사용자 입장에선 즐거운 편의성 향상이니까.

재밌는 것은 사용자들의 반응이다. 곳곳에서 ‘이게 뭐야, 안드로이드랑 윈도우 따라 했네’라는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 시작은 안드로이드지만 애플이 완성하는 거 아니냐고. 있는 것을 가져다가 가장 세련되게 다듬어 내고, 고급스런 네이밍으로 완성하는 애플의 재주를 보면 놀랍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적인 필링까지 당당하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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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지도앱의 개선점에 대해서도 요란스럽게 어필했는데, 어차피 국내에선 지원되지 않겠지만 두 가지 포인트에서 놀랐다. 일단, 대중교통 경로와 환승 정보가 표시되는 게 새로운 발표 내용이라니. 여러분 네이버 지도, 다음 지도 좀 써보세요. 둘째는 중국을 향한 애정 공세가 지도앱에 묻어난다는 것. 현재 애플의 지도앱은 세계 주요 도시 몇 곳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데, 중국 내의 300개 도시에 대한 대중교통 정보를 담았다더라. 덧붙여 중국어를 위한 새로운 폰트도 공개했다.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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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이야기를 이어 가다 보니 규모를 키워가기 위한 전략들이 많다. 애플뮤직만 해도 그렇다. 세상 모든 것들이 오로지 애플 생태계 안에 거해야 하던, 폐쇄의 상징 깍쟁이 애플이 안드로이드를 지원한다고 하지 않는가. 난 현장에서도 이 대목에서 가장 놀랐다. 구글과 제대로 붙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큰 시장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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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뮤직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만, 음악 서비스에 접근하는 방식은 아주 마음에 든다. 단순히 한 달에 9.99달러로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고 어필했으면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잔망스런 우리의 애플은 더 세련된 접근 방식을 택했다. 우리는 음악을 사랑하고, 아티스트를 존중하며, 음악 팬들이 아티스트와 교감하고 취향을 만들어갈 수 있는 ‘문화의 장’을 만들겠다고 말이다. 개발자 컨퍼런스의 키노트 현장에 드레이크가 직접 서게 만드는 센스란! 근데 행사 마지막을 장식한 가수는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다. 호응도 못해줘서 미안하다. IT 기자들이 원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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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화된 음악 추천리스트나 아티스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커넥트 메뉴는 좋은 스토리텔링의 예다. 음악은 서비스의 성능이나 속도, 가격을 떠나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어떤 음악을 듣는지는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취향의 문제니까. 특정 서비스가 내 취향을 대변해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선택받는 브랜드가 되겠지. 이것이 때깔 좋은 음악 문화로 작용한다면, 혹시 아나. 안드로이드 사용자들도 너나할 것 없이 애플뮤직을 쓰게 될지. (게다가 통 크게 3개월 무료다)

마지막으로 개인정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 구글의 사용자 개인정보 사용 범위에 대해 말이 많았다. 단적인 예가 구글포토다. 어마어마한 사진과 동영상 데이터를 공짜로 보관해주는 대신, 구글이 세계 정복도 가능할 만큼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게 된다는 사실이 도마에 올랐다. 물론, 구글은 노력하고 있다. 개인정보 관리 서비스를 내놓으며, 사용자가 개인정보 현황을 관리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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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어떻게 했을까? 사실 이번 키노트의 주요 화제 중 하나가 서비스의 개인화였다. 시리나 검색 서비스가 사용자의 생활 패턴과 취향을 파악해 개인화된 결과를 제공한다는 것은 편리함과 동시에 데이터 수집을 의미한다. 애플은 키노트 현장에서 이런 논란을 일축했다. 이런 서비스를 위해서는 사용자의 개인 정보가 필요하지만, 이를 사용자가 제어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한, 애플은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하지 않고 개인 기기에만 저장하며 서드 파티 업체와 공유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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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트 시작 직전에는 아주 흥겨운 노래들이 흘러 나왔다. 긴장을 풀기 위해 어깨를 들썩이며 감상했는데, 그중 ‘Centuries’가 기억난다. 원래 좋아하는 노래다. 기억에 많이 남을 행사였다. (급마무리하는 느낌이 들지만 아니다, 그만 쓸 때가 돼서 그런다) 노래 가사처럼. You will remember me, Remember me for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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