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태블릿, 아이패드 프로 써봤어요

아이패드 프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키보드가 등장했다. 잠시 후엔 애플펜슬이 등장했다. 미국 현지 날짜로 9월 9일. 애플의 야심찬 스페셜 이벤트가 있던 어제, 나는 샌프란시스코 빌 그레이엄 시빅 오디토리엄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대형 아이패드에 대한 루머가 처음 보도됐을 때, 나는 피식 웃었다. 적어도 당시의 내게 10인치 이상의 대화면 아이패드는 안드로이드 기반의 아이폰처럼 황당무계하게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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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팀 쿡이 12.9인치의 아이패드 프로를 꺼내들었을 땐, 아주 진지한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OS X의 새 명칭을 두고 늘어놓는 유쾌한 농담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그 거대한 태블릿은 현실세계의 존재였다. 머릿속으로 잠시 딴생각이 떠올랐다. 분명 한국에선 이런 제목의 기사가 등장할 것이다. “무덤 속 잡스가  일어날 만한 아이패드 프로”(실제로 행사 뒤에 숙소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정말 거의 비슷한 기사 제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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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와 고인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건 스티브 잡스 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라고 말하는 건 참으로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시대는 바뀐 지 오래되었고, 위대한 일들은 기억으로 남았다.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때는 지독했던 것들이 이제는 세련된 것일 수 있듯이 말이다. 마치 금단의 열매 같았던 대화면 아이폰6 시리즈가 불티나게 팔렸듯이.

하지만 이런 전제에도 불구하고 아이패드 프로는 낯설다. 키보드에 스타일러스까지 더해진 액세서리 조합은 더더욱 낯설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너네는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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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상황에 대한 의심과 의문은 합리적인 것이다. 나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아이패드 프로를 뜯어보기로 했다. 일단 12.9인치의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지금 내가 기사 작성 중인 노트북이 11인치다. 1.9인치나 더 큰 태블릿이라니. 이게 꼭 아이패드가 떠맡아야 할 역할이었을까? 내 의문의 시작점은 여기다.

최근 내가 기사 작성을 위해 가장 즐겨 쓰는 휴대용 기기는 아이패드 에어2다. 이 제품이야말로 몇 번을 칭찬해도 아깝지 않은 걸작이다. 아름답고, 가볍고, 얇으며, 빠르다. 이전까지의 iOS 기기에서 맛보지 못한 쾌적함과 속도를 제공한다. 게다가 반사가 적은 디스플레이는 야외에서 쓰기에도 걸맞다. 에어2에 벨킨의 키보드 케이스를 결합한 조합에 100점 만점을 주고 싶다. 물론 당연히 부족함은 있다. 마우스의 부재가 야기하는 생산성 부족이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콘텐츠 즐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아무리 성능이 빨라도 일련의 기능들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답답함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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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이패드 프로는 이런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전용 스마트 키보드와 애플펜슬의 조합은 생산성을 몇 배로 올려줄 것이다. 아이패드 에어2를 어디든 가지고 다니며 누렸던 휴대성은 몇 배로 낮아지게 된다.

이제 슬슬 ‘프로’의 타이틀을 단 이 아이패드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용자 환경을 추구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애플은 여태껏 세상 사람 누구나 아이패드를 이용하면 더 넓은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해왔다. 아이패드는 진입 장벽이 낮은 기기였다. 아주 어린아이들, 학생, 중년층 누구나 아이패드를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요리 레시피를 배우고, 동영상 강의를 듣거나 교육용 앱으로 알파벳을 배운다. 혹은 이보다 더 전문적인 작업도 이루어질 수 있다. 앱스토어에는 수많은 앱이 준비돼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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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군가는 아이패드 에어나 아이패드 미니의 화면이 비좁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여태까지의 아이패드가 노려왔던 것처럼 세상 사람 누구나는 아니다. 조금 더 창의적이며 생산성이 요구되는 작업을 원하는 누군가다. 조금 더 목적이 확실한 사용자를 노린다면, 새로운 수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전까지는 화면 크기의 한계와 성능의 문제로 아이패드를 외면했던 사용자의 니즈를 건드렸을 수도 있단 얘기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아이패드 역시 맥북처럼 에어와 프로라는 라인업을 갖추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전략이 아이패드에서도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논란과 흥분이 공존하는 아이패드 프로를 살짝 사용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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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을 제기했지만 제품의 만듦새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이 만족스럽다. 이것이 바로 애플의 무서움이다. “아니 이걸 왜 만들었어. 누가 산다는 거야” 하다가 만져보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시장이 바뀌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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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는 정말 훌륭하다. 여러 가지 휴대용 키보드를 사용해봤는데, 이렇게 얇은 두께로 이런 키감을 구현하는 제품은 처음 만나봤다. 심지어 플라스틱도 아니다. 부드럽지만 탄탄한 패브릭으로 감싸 있으며, 재봉선이 없는 하나의 바디로 이루어졌다. 덕분에 키보드의 안전을 호시탐탐 위협하는 각종 오염물질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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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 스프링이 없다는데도, 타자치는 손맛은 살아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주 가볍고 부드럽게 눌리지만, 미묘한 탄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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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휴대용 키보드를 쓰면 늘 겪어야 하는 블루투스 페어링의 번거로움이 없다. 아이패드 프로와 스마트 키보드가 스마트 커넥터 포트를 통해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키보드는 별도의 연결 작업이나 충전도 필요하지 않다. 포트가 맞닿는 즉시 연결되고, 떨어지는 즉시 화면에 가상 키보드가 나타난다. 이런 키보드에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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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번엔 애플펜슬 차례다. 손에 쥐어보면 생각보다 묵직하다. 이 제품은 도킹 상태에서 사용할 수 없다 보니 불가피하게(?) 블루투스를 사용하는데 제품 뒤꼭지에 라이트닝 커넥터를 탑재해 아주 유용하게 써먹는다. 일단 라이트닝 단자를 아이패드 프로와 연결함으로써 빠른 페어링이 이루어지며, 충전도 가능하다. 15초 충전이면 30분 정도는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배터리 걱정은 거의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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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스케치를 하며, 나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해 보았다. 애플펜슬은 아주 똑똑한 센서로 압력은 물론 펜의 기울기까지 인식한다. 펜이 기울어질 때 화면과의 거리를 인식한다는데, 사용해보니 기울기를 바꾸는 것만으로 같은 툴로 전혀 다른 펜 선을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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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왼쪽의 연필 선의 두께가 기울기에 따른 변화를 보여준다. 펜슬을 똑바로 세우면 가늘고 날렵한 선이 나오고, 눕듯이 기울이면 두껍고 거친 느낌의 크로키에 적합한 펜 선이 나온다. 시연해본 제품으로는 미묘한 딜레이도 느낄 수 없었다. 빠르고 놀랍다.

한국에서 궁금해하고 있을 여러분을 위해 한가지 더 알려드리면 팜리젝션이 적용돼 있다. 애플펜슬로 스케치하면 손바닥이나 손가락이 닿아도 인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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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프로에 내장된 기본 스케치앱도 아주 잘 만들어놨다고 느꼈는데. 펜을 쥐지 않은 손으로 두 손가락 멀티 터치를 하면 자(ruler) 툴을 꺼낼 수 있다. 가상 자에 대고 선을 그으면 똑바른 선이 그어진다. 시연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아, 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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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이 넓다 보니, 들고 있을 때 마치 신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iOS9의 화면 분할 기능은 이 제품을 위한 선물이었음을 알게 됐다. 12.9인치는 나눠 써도 넓다. 게다가 CPU 성능이 뛰어나 두 가지 앱으로 다른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도 버벅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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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무비로 영상을 편집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작업물이 아이폰6S로 촬영한 4k 영상이다. 태블릿으로 4k 영상을 편집하다니! 아이무비에서 3개의 4k 영상을 동시에 편집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내 PC도 못하는 일을 아이패드가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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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비와 마이크로소프트까지 동원해 오피스와 프로크리에이티브 앱을 선보인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 문서 작업과 창의적인 작업을 위한 최고의 파트너들이니 의외지만 좋은 선택이다. 펜을 이용해 낙서하듯 작업 영역을 선택하고 그림과 텍스트를 붙여 넣어 순식간에 하나의 잡지 레이아웃을 만드는 과정은 잊히질 않는다. 구체적인 시연을 통해 이 기기가 얼마나 전문적인 영역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지 암시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영역의 전문가가 아니니 그들의 선택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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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프로는 인기가 너무 많아서 시연을 해보는 것만 해도 전쟁이었다. 다들 호기심이 제대로 오른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특징을 더 언급하겠다. 바로 스피커. 4방향 스테레오 스피커를 장착했다. 여태까지의 아이패드가 한 쪽으로 쏠린듯한 소리가 났다면(실제로 한쪽 끝에만 스피커가 있으니까) 프로는 더 풍성한 소리를 뿜어낸다. 전쟁통 같은 행사장에서 들었으니 음질까지는 모르겠지만, 사운드는 빵빵하다.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영상 편집을 위해 틀어놓은 아이패드 프로 사운드를 옆 섹션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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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의문은 남지만 한번 어설프게 써보고 나니 더 써보고 판단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재미있는 기기다. 필요 여부를 떠나 사람을 설레게 만든다. 모두에게 필요하진 않겠지만, 특별한 기기임은 분명해졌다.

가격에 대해서는 조금 할 말이 있다. 32GB 기준 799달러인 제품 자체의 가격은 그렇다 치고, 아이패드 프로의 필수 액세서리인 스마트 키보드와 애플펜슬의 가격도 상당하기 때문. 각각 169달러, 99달러니 이 액세서리 두 개를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태블릿 가격이 나온 셈이다. 이 부담은 어떻게 작용할까? 최근 불거진 아이패드 위기론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었을까? 새로운 카테고리로 정착하게 될까?

아, 이상하지. 제품 공개 현장에 참여하고, 직접 사용해보기까지 했는데 궁금증은 더 늘어났다. 자꾸자꾸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 궁금증을 느끼는 게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를 알고 싶어 한다. 이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