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메르세데스-벤츠 GLE 쿠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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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dentified Flying Object. 미확인 비행 물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UFO를 풀어 쓴 말이다. 식별가능 비행 물체(IFO, Identified Flying Object)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갑자기 왠 토요미스테리극장이냐고? 메르세데스-벤츠가 최근 내놓은 GLE 쿠페가 나에게 있어 UFO 같은 존재여서다. UFO의 본래 의미는 ‘외계인 타고 다니는 우주선’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것들 중에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뜻하는데, GLE 쿠페가 그렇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GLE 쿠페라는 이름은, 메르세데스-벤츠의 새 이름 체계에 따라 기존 M-클래스(혹은 ML)에서 메르세데스 SUV를 뜻하는 ‘GL’에 크기를 의미하는 ‘E’를 결합하고, 다시 쿠페 같은 외견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쿠페’를 붙였다. 시간을 앞으로 돌려 설명하자면 메르세데스-벤츠 주력 SUV인 M-클래스의 쿠페 버전. M-클래스가 GLE로 바뀌었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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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는 대단히 ‘식별가능한 물체’다. 답이 이미 나와 있다. 이미 <카> 매거진 한국판에서도 ‘훌륭한 이름값의 모범적인 예’라는 말로 칭찬했다. 워낙 M-클래스 때부터 호평을 받아온 바, 새로운 이름과 외모를 부여받은 GLE는 말할 것도 없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정통 SUV라는 계보를 완벽하게 이은 차가 GL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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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SUV는 역동을 논하기에 굉장히 어려운 측면이 있다.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속에서 직선이든, 곡선이든 효과적으로 달리려면 자세가 낮아야 하는데, SUV는 키가 껑충해서 그러기가 힘들다. 물론 요즘에는 키가 조금 낮은 SUV가 나와 고성능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일도 있다. 그러나 정통 SUV를 표방하는 모델들은 아무리 역동을 강조해봤자 공염불이다. 내가 정한 게 아니다. 자연의 섭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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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메르세데스의 의도는 이해가 갈만하다.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원하는 소비자가 전통적인 메르세데스-벤츠 지지자 중에도 분명 있을 테니까 말이다. 누구나 근엄하고 꽉 막힌 세단과 SUV만을 원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GLE 쿠페는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기 위해 GLE보다 81밀리미터 길이를 늘리고, 68밀리미터 폭을 넓혔으며, 68밀리미터 키를 낮췄다. 완전히 다른 두 가치, 그러니까 SUV와 쿠페를 융합하려는 본질적인 접근을 이루어보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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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AMG DNA를 삽입했다. AMG 프런트와 리어 에이프런, 21인치 AMG 알로이 휠을 넣었다. 현 세대 메르세데스-벤츠 제품들이 공통적으로 그리는, 측면의 떨어지는 선, 이른바 ‘드로핑 라인’은 지붕에서 아래로 흐르는 완만한 실루엣과 조화를 이룬다. 실내에도 AMG를 담았다. 완전한 원이 아닌 밑둥을 잘라 ‘D’자를 눕힌 듯한 AMG 스포츠 스티어링 휠과 나파가죽도 마련했다. 알루미늄 트림과 AMG 플로어 매트, 페달은 잘 차려입은 턱시도 같은 고급스러움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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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트레인은 V6 2천987cc 디젤과 9단 트랜스미션을 조합, 메르세데스-벤츠 네바퀴굴림시스템 4매틱을 더했다. 역시 GLE와 동일. 운동능력에 큰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다. 최고출력과 최대토크도 각각 258마력, 63.2kg·m로 같다. 달리는 느낌도 비슷. 쿠페가 가진 본연의 강력한 달리기를 원했다면 그 기대를 조금 접는 편이 좋겠다. 전형적인 SUV라는 시각으로 바라본 GLE는 여유롭고, 힘이 넘치는 특성을 갖고 있는데, GLE 쿠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외모만 보면 참 잘 달릴 것 같지만, 상온에 두어 묽어진 버터처럼 끈적하고, 느끼하다. 눈으로 보이는 것과 몸으로 느껴지는 차이는 꽤나 크다. 실제 0→시속 100km 가속시간은 7.0초로, GLE보다 불과 0.1초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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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장도로에서도 무리가 없이 달리게 해주는 기능이 포함된 다이내믹 셀렉트, 어댑티브 댐핑시스템을 장착한 에어매틱 에어서스펜션도 들어갔다. 이 에어서스펜션은 지상고를 아주 획기적으로 올리는데, 쿠페 스타일의 SUV에 과연 필요할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 오프로드 주파 성능도 쿠페에게는 그다지 필요없어 보인다. 정체가 모호하다는 생각의 뿌리가 여기서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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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벤츠는 늘 시대를 앞선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S-클래스가 가진 위용이 그랬고, C-클래스의 영민함이 증명했으며, E-클래스가 여기에 정점을 찍었다. GLE라는, 구세대 플랫폼에 껍데기와 이름을 바꾼 그 차는, 그래도 정통 SUV라는 자부심과 상품성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GLE 쿠페는 메르세데스-벤츠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어했는지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그저 요즘 유행만을 따르는 것이 철학이었나? 차라리 새 토대 위에 설계할 차세대 GLE에서 나왔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드센 BMW 마니아 사이에서 “그래도 차는 메르세데스-벤츠지”를 끊임없이 외쳐왔던 나에게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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