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의 일본산 대형범선

파일럿. 과하게 우람해서 기가 죽었다. 덩치 큰 SUV가 복잡하고 좁은 서울도로에 어울릴까? 운전석으로 기어올랐다. 옆차선 버스기사와 하이파이브를 해도 될 높이다.

덩치만큼 큰 스티어링 휠을 잡고 길을 나섰다. 도로 위 범선 선장이 된 듯했다. 가속페달에 무게를 싣자 도로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대배기량 3.5리터 자연흡기엔진이 묵직하고 부드럽게 차체를 움직였다. 284마력과 36.2kgm 토크의 V6는 6단 자동기어박스와 호흡을 맞췄다. 날카로움보다 부드러운 맛이 도드라지는 파워트레인은 덩치 큰 파일럿에 어울렸다. 강물처럼 부드럽고 묵직하게 반응하다 풀드로틀을 하면 살짝 숨을 고르고 제법 박력있게 속도를 높였다. 서스펜션은 부드럽지만 묵직했다. 덩치를 고려하면 고속에서도 제법 안정적이었다. 혼다는 주행안정감을 높이기 위해 네바퀴굴림시스템 i-VTM4를 넣었다. 앞뒤는 물론 좌우바퀴까지 상황에 따라 토크를 나눠 쓰며 덩치 커서 불리한 움직임을 추스르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썼다.

14

범선은 넉넉하지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은 힘으로 뭉툭하게 속도를 높였다. 말랑하지만 휘청거리지 않았고, 부드럽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무디지만 덩치를 생각하면 코너링도 제법이다. 오른쪽 방향지시등을 켜면 대시보드 가운데 모니터에 우측 도로상황이 영화처럼 나타났다. 사각지대는 왼쪽이 더 커서 운전에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왜 오른쪽만 보여줄까? 차체가 넓어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보려면 전방 시야를 벗어날 만큼 고개를 돌려야 한다. 그래서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줄이려는 의도다. 특이한 기능은 쓸수록 익숙하고 생각보다 편했다.

어코드 앞모습을 부풀려 만든 듯한 얼굴이 제법 매섭다. 쪽 찢어진 헤드램프는 프런트 그릴과 이어 붙었고, 선을 넣은 보닛은 입체적이다. 덩치 큰 SUV는 창의적 디자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적다.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의미다. 파일럿은 나쁘지 않지만, 크고 뚱뚱해서 운동신경이 별로 없어 보였다.

12

무난하고 수더분한 인상은 실내도 비슷하다. 대시보드 한가운데 8인치 터치스크린 모니터, 그 아래 공조장치와 2단 열선시트가 자리잡았다. 10년 넘게 사용한 듯 익숙한 계기반은 구성이 단순한 만큼 직관적이어서 보기에 좋았다. 고회전엔진답게 8천rpm 중 레드존은 6천800rpm부터 시작했다. 스티어링 휠에는 ACC와 인포테인먼트 버튼도 달렸다. 기능에 충실한 기어노브는 D와 L. 스포트모드는 없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스포트모드는 차라리 없는 게 낮다. 대신 주행모드 버튼을 따로 달았다. 인텔리전트 트랙션관리시스템이라는 이름의 주행모드는 일반과 눈길, 진흙과 모래 네 가지. 상황과 모드에 따라 네 바퀴의 트랙션을 제어해 상황을 헤쳐나간다.

버튼을 눌러 ACC를 활성화했다. 설정속도 안에서 차간거리를 유지하며 달리는 능동적 시스템은 유유자적 나들이 떠나는 선장에게 요긴한 아이템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행하던 중 옆차선 얌체운전자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놀라 황급히 브레이크. 하마터면 보험사직원을 부를 뻔했다. 시스템은 반응이 늦었다. 갑자기 끼어드는 앞차나 장애물을 좀더 빨리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 장치를 믿고 사용할 수 있다. 흐릿한 반응은 돌발상황뿐만이 아니었다.

ACC 기능을 활성화해 힘차게 가속하다 앞차가 나타나면 거칠고 강하게 속도를 줄였다. 그러는 사이 브레이크페달 근처로 발이 왔다갔다 애가 탔다. 혼다는 시스템 반응과 작동을 좀더 부드럽고 정확히 완성해 운전자에게 믿음을 줘야 한다.

커다란 범선에는 첨단안전장비가 풍성하다. 추돌경감제동시스템은 계기반에 브레이크 경고문구를 띄우며 시속 15km 이상이라면 알아서 차를 세운다. 차선유지보조시스템은 시속 70~140km 사이에서 차로를 이탈했을 때 경고음과 함께 스티어링 휠을 알아서 돌린다. 반자율주행기능만큼 반응과 움직임이 세심하고 정확하지는 않다. 최악의 상황을 막는 수준이다. 있어서 좋은 첨단장비지만 설익어 반응이 애매했다.

13

실내는 수납공간으로 넘쳤다. 커다란 문짝에는 3단 포켓이, 센터페시아 아래 컵홀더와 터널 사이에는 여닫이문을 단 깊고 넓은 공간을 품었다. 8인승 SUV의 가장 큰 장점은 넉넉한 실내공간과 다양한 시트 구성이다. 2+3+3인의 3열구조는 구성과 쓰임새가 좋다. 3열시트는 바닥이 높아 무릎을 좀 세워야 하지만, 어른 둘은 앉을 만했다. 8인승이지만 실제는 7인승이다. 3열시트는 등받이에 달린 끈을 잡아당겨 접고 펼 수 있다. 완벽히 평평하게 접혀 평소에는 짐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3열시트에 오르내리는 것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2열시트에 달린 원터치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접히면서 앞쪽으로 슬라이딩돼 3열시트로 가는 통로를 만든다. 2열시트 또한 3열시트처럼 평평하게 접으면 운동장으로 바뀐다.

일본산 대형범선은 대체로 무난하다. 최대장점은 광활한 실내공간. 큰 덩치와 대배기량 가솔린엔진답게 먹성도 좋다. 실제연비는 공인연비(리터당 8.9킬로미터)를 넘기 힘들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여유있게 내달리면 크루즈 부럽지 않은 유람선이 되지만, 복잡한 시내나 자리 찾기 힘든 주차장에서는 운전이 피곤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커서 여유롭지만, 커서 불편한 점도 적잖다. 좁은 땅에서 큰 덩치와 넓은 공간은 또 다른 낭비이자 허세일 수도 있다.

15


LOVE  덩치 커서 넉넉한 실내공간과 수납공간
HATE  덩치 커서 신경 쓰이는 운전과 너무 좋은 먹성
VERDICT  아이 셋 이상의 비둘기가족이라면,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