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벼락 맞는 꿈이란. 돼지꿈? 페라리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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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마력의 V8 페라리에 성인 남성 셋이 앞뒤로 앉아 서킷을 달렸다. 앞서가는 캘리포니아 T의 뒤태에 눈이 홀렸는지, 조심 또 조심하라던 인스트럭터의 조언이 희미해졌다. 아뿔싸, 코너 진입속도는 빨랐고, 레코드라인은 무너졌다. 어김없이 언더스티어. 하지만 내가 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자세를 바로잡는, 안정적인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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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T, GTC4루쏘 T, 488 GTB가 나란히 달린다

언제고 그런 꿈을 꿨다. 돈벼락 맞아 초호화 수퍼카 몇 대쯤 세워두고 매일매일 골라 타는 영화 같은 삶.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 열정 가득한 이탈리안 수퍼카를 타고 지중해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거나 서킷을 누비는 꿈. 4월 25일 인제 스피디움에서 펼쳐진 페라리 미디어 시승회에서, 아주 잠깐 꿈의 한 가닥 끝자락이나마 잡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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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설렜다. 강원도 산골까지 향하는 길 내내 날씨가 좋았던 탓만은 아니다. 서킷에서 페라리를 처음 몰아볼 기대감 때문이리라. 새벽바람을 가르며 도착한 인제 스피디움. 페라리를 상징하는 ‘박차 오르는 말’ 무늬 붉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펄럭이는 깃발 사이로 저 멀리, 샛노란 페라리 한 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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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K(포르자 모터스 코리아)가 마련한 무대 한 켠을 차지할 488 GTB였다. 녀석의 역할은, 러버콘 사이를 휘젓는 슬라럼으로 관객들에게 페라리 향기를 흩뿌리는 것. 이미 수차례 열연을 펼치느라 타이어가 많이 닳았지만, 거듭된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주차장 가득 울려 퍼지는 3.9리터 V8 터보엔진의 매혹적인 음색과 칼 같은 핸들링에, 시선이 자연스레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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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너머 트랙 위에서 또 다른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GTC4루쏘 T, 그리고 그와 함께 심장을 공유한 오픈톱 모델 캘리포니아 T 두 대가 어울려 연주하는, 현란한 삼중주였다. 아스라이 들려오던 굉음이 가까워질수록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관객들의 발걸음 또한 피트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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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시트로 뒷좌석을 채운 GTC4루쏘 T

GTC4루쏘는 V12 자연흡기엔진의 다이내믹한 성능에, 개별 폴딩 가능한 두 개의 뒷좌석과 450리터 용량의 트렁크로 일상 속 쓰임새를 더한, 실용적인 그랜드 투어용 페라리였다. GTC4루쏘 T는 트윈스크롤 터빈을 받아들이며, 실용적인 페라리의 성능을 한층 더 끌어 올린 기대주. 공기역학적으로 다듬어 매끈하게 빠진 슈팅브레이크 보디가, 눈부신 자태를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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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진 트랙 시승은 GTC4루쏘 T와 캘리포니아 T 한 대당 세 바퀴씩. 먼저 주인공의 뒷좌석에 올랐다. 앞보다 높게 자리한 뒷좌석에서, 좌우로 요동치는 몸을 버킷시트에 안긴 채 내려다보는 느낌은 또 색달랐다. 저 멀리 둬야 할 시선 대신, 보닛 바로 앞의 상황을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키 180센티미터인 기자의 정수리가, 천장 가득 자리한 파노라마 루프와 부딪힐까 걱정하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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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멧을 뒤집어쓰고 운전석으로 갈아탔다. 솔직히, 긴장했다. 내가 온전히 다룰 수 있을까 싶었다. 자신의 역량 안에서 몰아야 안전하지만, 욕구를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한 바퀴 달린 후, 인스트럭터의 차를 따라 점차 속도를 붙였다. 실력도 안 되는데 괜히 흥분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말이 박차고 오르는 데 사용한 건 땅이 아니라 내 배짱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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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쭙잖은 배짱과 호기로운 마음, 중독성 짙은 배기음에 혹해 속도는 거침없이 빨라졌고, 그립주행을 강조했던 인스트럭터의 조언이 희미해져 갔다. 최고 610마력, 무지막지한 77.5kg·m의 최대토크와 터보랙을 느끼기조차 힘든 최신 엔진성능에, 속도에 따라 뒷바퀴까지 조향하는 네 바퀴 조향시스템(4WS)과 최신 사이드 슬립앵글 컨트롤(SSC3)에 대한 과신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스핀으로 이어질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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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니었다. 자세제어장치가 바로 개입해, 마치 내가 똑바로 잡은 것처럼 차체를 제자리로 돌려놔 그립을 회복했다. 아, 이거 진짜 물건이구나 싶었다. 나도 모르게 욕심내다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 안정감 넘치는 페라리를 경험했다. 마음이 가라앉은 뒤, 아쉬움을 머금고 캘리포니아 T로 향했다. ‘GTC4루쏘 T의 긴 휠베이스(2천990밀리미터) 탓이 아니다, 내 과욕이 부른 일이다’라는 자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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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안정을 찾고 운전하자, 페라리의 매력을 살펴볼 수 있었다. ‘2016 올해의 엔진 대상’을 수상한 V8 터보엔진은 명불허전. 같은 조합의 파워트레인(V8 터보엔진 + 7단 듀얼클러치 트랜스미션)이지만, 더 가볍고 작은 데다 GTC4루쏘 T와는 또 다른 배기노트가 가슴을 울렸다. 만약 뒷좌석에 함께할 가족 또는 친구들이 없다면, 다루기 쉽고 성능 출중한 그랜드 투어러는 캘리포니아 T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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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직장 동료와 함께 출근할 때, 가끔은 바닷가나 스키장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짐 부리기 좋은 건 단연 GTC4루쏘 T였다. 부족함을 찾을 수 없는 성능에 실용성까지 가미한 페라리식 그랜드 투어러. 늘 그래왔듯, 페라리가 아주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했다. 언제고, GTC4루쏘 T와 함께 먼 여행을 떠나는 꿈을 꿔본다. 아니, 그 전에 운전연습부터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