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산 모험가, 피아트 쿠페

이름조차 몰랐지만, 디자인 하나로 머릿속에 각인된 스포츠카.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이탈리아 스포츠카의 톡톡 튀는 매력에 한껏 빠져들었다

치고받고 달리는 홍콩 액션영화에서 처음으로 피아트 자동차를 보았다. 영화에서 피아트는 마피아 두목의 자동차였다. 주인공의 BMW를 맹렬히 추격했던 검정색 세단. 아버지는 저 차가 피아트라고 알려주었다. 그 영화 때문일까? 이후 피아트는 날쌔고 강렬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한동안 피아트를 새까맣게 잊고 있을 때, 그리고 수입차가 여전히 희귀했던 시절에 수퍼카처럼 낮고 멋진 스포츠카를 발견했다. 디자인 자체가 파격적이었다. 온통 세단으로 즐비한 서울에서 톡톡 튀는 디자인과 날렵한 자세로 시선을 모조리 휩쓸었다. 성난 배기음을 남기며 사라져간 스포츠카의 정체가 궁금했다. 트렁크 아래에 조그맣게 달린 파란색 엠블럼. 바로 피아트였다.

마피아의 자동차로만 알고 있었던 피아트를 다시 만났다. 그동안 이름 모를 스포츠카로 디자인만 기억하다가, 이제는 피아트 ‘쿠페’라는 이름도 알게 되었다. 물론 마피아가 모는 거친 이미지는 영화 속 허구였다. 대신 피아트 쿠페의 독특한 이력을 새로 알았다. 파격적인 디자인은 자동차디자인 거장 크리스 뱅글의 작품이란 걸, 그리고 인테리어는 피닌파리나에서 완성했다는 사실 말이다. 한 마디로 세계적인 디자인 거물이 매만진 스포츠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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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식으로 12만 킬로미터를 달린 피아트 쿠페. 연식에 비하면 아직도 쌩쌩한 기운이 넘쳤다. 짙은 보디 컬러는 햇살 아래서 깊은 바다처럼 푸른빛이 감돌았다. 디자인은 지금 다시 봐도 혁신적이다. 지금처럼 공기저항계수를 일일이 따지며, 오직 효율성만 따지는 디자인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토록 실험적인 디자인을 양산차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피아트 쿠페를 더 특별하게 했다. 곳곳에서 이탈리아 브랜드의 독특한 스타일이 돋보였다. 보닛 위로 솟아난 헤드램프와 두 개의 동그란 테일램프는 마치 페라리에서 가져온 것 같았다. 외관은 신기한 아이템을 주렁주렁 달았다. 차체 밖으로 툭 튀어나와 눈부시게 빛나는 스테인리스 주유구, 손가락 두 개만 간신히 들어가는 도어핸들에는 실험적인 스타일이 반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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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로 들어서자 피닌파리나 엠블럼이 대시보드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세월의 흐름을 부정할 수 없지만, 여전히 세련된 인테리어다. 피닌파리나는 대시보드부터 도어트림까지 이어지는 랩어라운드 스타일을 무려 20년 전에 실현했다. 작은 스티어링 휠과 우뚝 솟은 기어레버는 스포츠카의 상징이다. 피아트 쿠페는 오직 수동기어만 고집하며 스포츠카의 자존심을 지켰다. 우락부락한 시트도 분위기를 더했다. 시동키를 돌리자, 계기반 바늘이 바쁘게 움직인다. 네 개의 클러스터에 담아낸 그래픽은 수수함 그 자체다. 하지만 속도계와 엔진회전계는 기본, 냉각수 온도계, 유온계, 유압계까지 주행성능에 지표가 되는 정보를 깨알같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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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 쿠페에는 배기량 1.8~2.0리터까지 다섯 가지 엔진이 있다. 시승차 심장은 2.0리터 16V 터보엔진이다. 조용해도 최고출력 196마력, 최대토크 29.5kg·m를 뽐내는 화끈한 유닛. 0→시속 100km 가속을 7.5초 만에 돌파하는 뛰어난 성능을 자랑한다. 낮은 시트에 파묻혀 기어를 1단에 밀어 넣었다. 나긋나긋한 클러치를 달래며 드디어 출발. 쿠페 심장이 펄떡이며 거친 숨소리를 토해낸다.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터보랙이 발목을 붙잡은 것. 예상은 했지만, 요즘처럼 똑똑한 다운사이징 엔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수동기어의 손맛은 여전히 찰지다. 2단, 3단 차례대로 쏙 빨려 들어가는 기어레버가 경쾌하게 가속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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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m 바늘이 2천500을 넘어선 순간, 피아트 쿠페는 고음 멜로디로 화답하며 순식간에 치고 나갔다. 방금 터보랙에 허덕이던 엔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강력한 토크를 쏟아낸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이어지는 변속에 성난 엔진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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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코너로 몰아붙이면 쿠페는 호들갑을 떨었다. 약한 타이어를 핑계 삼아 엄살도 피운다. 그래도 정작 뛰어들면 부드러운 궤적을 남기며 코너를 공략했다. 하지만 여전히 앞이 무거운 구조가 한계를 보였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나는 가속페달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하게 달리는 피아트 쿠페. 물론 지금은 200마력이 넘는 모델이 차고 넘치지만, 피아트 쿠페는 시대를 앞선 디자인과 알싸한 가속력으로 서울을 주름잡았을 것이다. 피아트 쿠페가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조금만 더 젊었어도….”

사진 최대일


Iconic Design Cars

수많은 신차가 쏟아지지만 정작 디자인으로 흥행한 차는 많지 않다. 시대를 풍미하며 디자인 하나로 세상을 뒤집어 놓은 스포츠카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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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di TT

1998년, 아우디 라인업에 꽃이 피었다. 주인공은 바로 아우디의 소형 스포티카 TT. 공개 당시 앞뒤가 대칭인 매력적인 스타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프리먼 토마스와 피터 슈라이어가 디자인했으며, 여전히 자동차 디자이너 사이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자동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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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Z3 BMW

디자인이 절정에 이른 시기는 1990년대다. 당시 등장했던 소형 로드스터 Z3도 아름답기는 매한가지. 작지만 다부진 자세와 인상적인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일본인 디자이너 조지 나가시마가 그렸으며, 영화 <007 골든 아이>에서 본드카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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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da MX-5

경량 스포츠카의 대부는 단연 마쓰다의 MX-5다. 가벼운 차체에 경쾌한 엔진, 무엇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예쁜 디자인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 흥행 비결이었다. 특히 팝업식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는 시대를 앞서가는 MX-5의 전매특허 아이템이다.

김장원

너무 진지할 필요 없어요. 쉽고 즐거운 자동차 이야기를 조명합니다.
bejangwon@carmagazi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