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어도 가질 수 없는 너, 쉐보레 볼트 EV

이것저것 고민하지만, 쉽사리 사서 탈 수 없는 차가 지금의 전기차. 신기루 같은 전기차시장에 쉐보레가 혹할 만한 녀석을 내놓았다

국내 판매 중인 전기차들은(몇 가지 되지도 않지만) 사막의 신기루나 오아시스 같은 존재들. 대단히 미래지향적이고 친환경적이며 첨단을 자처한다. 하지만 충전인프라와 주행가능거리, 비싼 차값 등을 고민하다 보면 어지간한 용기와 결단 없이는 내 돈 주고 사서 타기가 힘들다.

전기차가 시대의 신기루인 이유는 부족한 충전시설과 짧은 주행거리 때문. 한 번 충전 후 주행가능거리가 짧아도 충전시설이 넘쳐난다면 괜찮을 거다. 번거롭긴 해도 현실적일 테니까. 하지만 한 번 충전으로 겨우 100킬로미터 남짓 달릴 수 있는 전기차가, 충전시설마저 몇 개 없고, 불편하며, 절차가 까다로우니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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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을 위해 딱 이틀 이 녀석을 타고 다녔다. 충전을 위해 인터넷으로 충전시설을 찾았다. 다행히 집 근처 공영주차장에 시설이 있다. 마음이 가뿐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충전하지 못했다. 주차장관리자가 퇴근한 저녁이어서 시설 이용이 불가하다며, 대낮에만 오란다. 이런 젠장! 이러니 전기차는 신기루일 수밖에. 이같은 상황과 사정 탓에 전기차는 달리다 언제 멈출지 몰라 불안해하며 에어컨과 음악도 즐길 수 없는 자동차계의 철부지로 전락했다. 내연기관 엔진차들처럼 표준연비에 대한 이해도 적어 남은 배터리로 얼마나 달릴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도 늘 밑바탕에  깔려있다.

이같은 전기차 신기루 시대에 제법 괜찮은 녀석이 등장했다. 바로 쉐보레 볼트 EV. 가장 큰 장점은 한 번 충전으로 주행할 수 있는 거리가 무려 383킬로미터. 메이커가 허풍을 좀 친다고 해도 최소 250킬로미터는 마음 편히 달릴 수 있을 것이다. 패밀리룩으로 치장한 해치백 디자인은 스파크 큰형님, 또는 아베오의 작은형님 쯤 될 덩치다. 보디타입은 크로스오버나 MPV 정도 된다. 꽉 막힌 프런트 그릴과 존재하지 않는 머플러는 전기차의 상징. 하지만 전기차라도 엔진룸 속 모터와 시스템의 열을 식히기 위한 냉각팬은 필요하다. 그래서 범퍼 아래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그릴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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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충전으로 383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다. 급속전용 충전기에선 한 시간이면 완충, 40분이면 80퍼센트 충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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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그릴에서 시작해 헤드램프를 타고 사이드미러까지 이어지는 검정 유광 플라스틱 몰딩이 하얀 차체와 잘 어울린다. 헤드램프와 사이드미러 사이에 ‘BOLT EV’를 새겨 넣었다. 전기차 표식은 해치에도 하나 더 붙었다. 이를 빼면 전기차라서 유난 떠는 구석은 없다. 수많은 차들과 섞여 도로를 달려도 그저 자연스러운 자동차일 뿐이다.

껑충한 시트포지션은 타고내리기 편한 크로스오버다. 기아 카렌스나 니로 등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까. 넓고 높은 시야는 운전이 편하고 마음이 시원하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우월감을 주지만 안정감과 운전재미는 다소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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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재는 실용적이고 검소하다. 10년 전 유행하던 국산차 실내 감성이다. 밝은 은색 실내에 흰색 플라스틱 트림을 더해 디자인 포인트를 주었다. 단순한 실내는 다루기 쉽고 보기 좋다. 계기반과 대시보드 가운데 터치스크린 모니터도 디자인과 구성이 단순해 다루기도, 정보파악도 쉽다.

대시보드는 만주벌판처럼 광활하다. 낮게 누운 A필러와 화살촉마냥 앞으로 뾰족하게 쏠린 보디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화살촉 디자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사이드 캐릭터라인과 벨트라인도 뒤에서 앞으로 갈수록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더불어 창문 또한 앞으로 갈수록 커진다. 커다란 앞창과 누운 A필러 사이에 달아둔 쪽창 덕에 개방감이 엄청나다. 밑바닥 배터리 덕에 기본적으로 시트포지션이 높아 여행 좋아하는 풍류객들에게 더없이 좋겠다.

크로스오버 같은 실내는 수납공간이 넉넉하다. 평평한 바닥을 활용해 만든 앞시트 사이 수납공간에는 신발 한 켤레는 충분히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전기차답게 앞뒤로 USB 단자와 파워 아울렛도 여러 개다. 전기차라서 전기 나눔에 더 적극적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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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반은 전기차답게 응당 디지털. 커다란 원 안에 숫자로 속도를 알려주고 양쪽 옆에 바 형태로 주행가능거리와 주행상태 등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바 중간에 공을 그려 넣어 효율운전을 유도한다. 급가속이나 급제동을 하면 공이 아래위로 춤추며 경박한 운전에 경종을 울린다.

이틀 동안 약 250킬로미터를 열심히 달렸다. 고속도로와 차 많은 시내를 골고루 다녔다. 그래도 계기반에 표시된 주행가능거리는 90여킬로미터. 에누리를 완전히 떼도 300킬로미터 이상은 거뜬히 달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촬영과 이런저런 테스트를 위해 좀 과하게 달렸고 급가속과 급제동도 빈번했다. 버튼을 눌러 스포트모드로 화끈하게도 내달렸다. 중저음 탄탄한 보스 오디오 볼륨도 마음껏 키워봤고, 한낮 초여름 날씨 탓에 에어컨도 틀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한 번 충전으로 380킬로미터 주행은 빈말이 아니다.

전기차는 친환경 및 박애주의자의 아이콘. 소리없이 미끄러지듯 고요하고 얌전하게 달리는 게 미덕이다. 시동버튼을 누른다. 소리 없이 계기반에 불만 들어온다. 커다란 대시보드 모니터와 계기반에 세레모니 사운드와 그래픽이 출발준비 완료를 알린다. 전원 켜진 가전제품처럼 ‘윙윙’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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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미터가 좀 넘는 볼트 무게는 1천600킬로그램이 넘지만 움직임은 날카롭고 가볍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게 터지는 토크 덕분이다. 메이커가 비공식적으로 밝힌 0→시속 100km 가속은 7초대. 체감속도는 이보다 빠르다.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전기모터가 만드는 36.7kgm 토크가 고스란히 타이어로 전해졌다. 출발이나 주행 중 가속페달을 좀 깊게 밟으면 효율성에 치중한 친환경 타이어가 미끄러지며 고성능차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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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한 바닥에 수납공간을 채워 넣어 실용성을 강조했다. 신발 한 켤레는 거뜬히 들어간다

차 바닥에 낮고 넓게 깔아 올린 배터리가 껑충한 차체의 무게중심을 낮추었다. 덕분에 녀석은 오뚜기처럼 반응했다. 기우뚱거리며 허둥댈 만한 코너에서도 진득하고 안정적으로 라인을 그려나갔다. 낮은 무게중심과 무거운 차체, 비교적 탄탄한 서스펜션이 차고 높은 리무진처럼 독특한 감각을 만들었다. 다소 이질적이고 뭉툭하게 반응하는 스티어링은 운전재미를 반감시키지만, 이 차는 스포츠카가 아니라 친환경, 고효율의 전기차라는 걸 기억하자. 이 정도면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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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빼면 전기차라고 다르지 않다. D에서 기어노브를 당겼다 내리면 원페달 드라이빙 시스템으로 바뀐다

전기차 볼트 EV는 독특한 주행방법으로 재미를 키운다. 버튼식 브레이크시스템으로 속도를 줄이는 리젠 온 디맨드 시스템과 가속페달 하나로 속도를 다루는 원 페달 드라이빙 시스템이 그것.  감속 시 생기는 운동에너지를 활용해 배터리 효율성을 높이는 전기차의 필수장비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맛이 좋다. 리젠 온 디맨드 시스템은 스티어링 휠 뒤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천천히 감속하며 배터리를 충전하는 장치다. 원 페달 드라이빙은 재미가 더 크다. 가속페달을 밟는 양에 따라 정확히 가속하고 감속한다. 3분의 1을 밟으면 토크의 3분의 1로 속도를 높였다. 그러다 페달에서 발을 떼면 완전히 멈춰 선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금방 익숙해진다. 놀이동산 범퍼카 몰듯이 반응과 움직임이 독특한 이 모드는 기어노브를 D에서 L로 바꾸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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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거리 넉넉하고 공간활용성과 실용성, 운전재미도 나름 훌륭한 볼트 EV. 현실적인 문제는 가격이다. 4천779만 원짜리 단일 모델에 주행안전장치와 고급 옵션이 추가되는 세이프티 패키지를 고르면 4천884만 원이다. 배터리와 전기모터 등 원자재값이 비싼 탓이다. 하지만 정부보조금 1천400만 원에, 적게는 300만 원부터 많게는 1천200만 원까지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 보조금까지 더하면 2천만 원대로 떨어진다. 이 정도면 국산 준중형차 수준이니, 충분히 접근할 만하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초도 물량은 하루만에 다 팔렸다. 추가 투입은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분명한 것은 주행가능거리 스트레스 적고 실용성 충만한 전기차를 찾는다면, 이만한 녀석이 없다는 것. 내년을 기약하며 재판매 시기를 호시탐탐 엿보거나 중고차시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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