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8 클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빠른 것, 강한 것, 우월한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위기의 내연기관 시대에도 끝까지 살아남을 V8 클럽에 초대받았다

누가 빠른지 겨루는 도중 카메라 렌즈가 박살 날 뻔했다. 이날, 사진기자와 V8 사이에 신경전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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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여자 사람 친구와 신사동 가로수길을 걷고 있었다. 중요한 얘기를 나누느라 귀를 쫑긋 열고 있는데, 불현듯 요란한 엔진 소리에 그녀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그녀는 하던 얘기를 끊고서 “도대체 왜 저런 시끄러운 차를 타는 거야?”라고 물었다. 물론 내가 자동차 기자라서 묻는 말이었다. 사실 나는 그 답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허세 떠는 거지, 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시승한 메르세데스-AMG GT S는 우렁찬 배기음으로 아스팔트를 흔들었다. 분명 그녀에게 원망을 산 소음보다 더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 뒤를 따르던 쉐보레 카마로 SS와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 스포츠도 만만치 않았다. 시승 내내 고막이 얼얼할 정도로 포효했다. 그들은 전기차 세상으로 돌진하는 시대에 살아남은 영웅이었다. 하나는 시퍼렇게 날을 세운 순수 스포츠카, 다른 하나는 의욕 넘치는 머슬카, 마지막은 감수성 충만한 그랜드 투어러였다. 장르는 달라도 하나같이 뜨거운 심장을 품었다. 우리의 가슴을 달뜨게 만드는 V8 엔진이 이번 시승의 주인공이다.

영웅 셋이 모였으니 우리는 그들을 ‘V8 클럽’이라고 불렀다. V8 클럽은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거친 숨소리로 존재를 알렸다. “시동 좀 꺼봐! 시끄러워서 도저히 얘기할 수가 없어.” 만나자마자 사진기자가 V8 클럽을 경계했다. 오히려 나는 그런 V8 클럽이 반가웠다. 요즘 만나는 시승차라고는 죄다 배기량이나 실린더를 덜어낸 터보 엔진에, 나약한 하이브리드, 심지어 순수 전기차까지 주위를 맴돌았다. 열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엔진.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자동차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그에 반해 V8 클럽은 대세를 거스르는 용기로 넘쳐났고, 평범함을 거부하는 스웨그가 있었으며, 요즘 유행하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족의 일원이었다.

당신을 기마병으로 만들어줄 안장. 한번 올라타면 1 대 100도 문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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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8 클럽의 첫 번째 멤버는 메르세데스-AMG다. 그중에서도 가장 흉포하고 잔인한 GT S. 낮게 웅크린 GT S는 작은 눈을 치켜뜬 채 우리를 맞이했다. 실루엣은 전형적인 롱 노즈-쇼트 데크다. 유난히 기다란 보닛은 온전히 V8을 위한 공간이었다. 엔진 코드명 M178. 메르세데스-AMG가 고집한 V8 엔진의 최신 버전으로, 배기량 3982cc에 2개의 터보차저를 올리고 드라이 섬프 오일 순환 방식을 사용한다. 그동안 AMG는 V8 사랑이 대단했다. 때로는 슈퍼차저, 때로는 자연흡기로 방식은 달라도 언제나 V8과 운명을 함께했다. 이번 GT S의 심장은 바이터보의 힘을 빌렸다. 독특한 점은 2개의 터보차저를 ‘V’ 형태의 엔진 블록 사이에 올린 구조다. 메르세데스-AMG는 이를 ‘핫 인사이드 V(Hot inside V)’라고 부른다. 덕분에 엔진 크기는 더 작아졌고 반응성은 빨라졌으며, 배기가스는 줄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거운 드라이 섬프 오일 순환 장치를 엔진 하부에 설계해 무게중심을 낮췄다. 이는 이상적인 스포츠카의 진화 과정이다. 모든 부연 설명을 증명하듯, GT S의 최고출력은 무려 510마력, 최대토크는 무려 66.3kg·m에 달한다.

낮은 버킷 시트에 오르면 툭 튀어나온 볼스터가 옆구리를 죈다. 오죽하면 카마로와 그란투리스모의 시트가 나긋나긋하게 느껴질 정도다. 수많은 버튼은 모두 달리는 데 필요한 기능이다. 그중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템은 가변 배기였다. 그 버튼 하나면 V8 클럽의 허세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 GT S는 그 누구보다 강인했다. 스로틀을 열면 V8 엔진과 7단 DCT가 의기투합해 질주 욕망을 채웠다. 스포츠 플러스, 나아가 레이스 모드에선 폭격이 일었다. 뜨거운 배기가스가 머플러를 통과하며 폭음을 쏟아내고, 스로틀을 끊으면 팝콘을 한 움큼 뱉어냈다.

국도에 접어들며 GT S를 진정시켰다. 그제야 고양이가 발톱을 숨기듯, 잦아드는 배기 사운드가 욕망을 숨겼다. 덩달아 서스펜션이 궁합을 맞춘다. 한결 나긋나긋한 승차감이 명상의 시간을 마련해준다. 물론, 잠이 올 만한 환경은 아니다. 하지만 순수한 스포츠카 기준엔 사치나 다름없었다. 그 순간, 16비트로 울려 퍼지는 배기 사운드가 실내로 파고들었다. 가슴을 울리는 탄탄한 베이스 사운드. 그건 분명 GT S의 소리가 아니었다.

애플 카플레이 OK! V8 서브우퍼 OK! 힙합 클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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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주인공은 V8 클럽의 두 번째 멤버, 바로 카마로 SS다. 차가운 은빛 컬러에 떡 벌어진 어깨 라인을 과시하며 하이 빔을 쏘아대고 있었다. 카마로는 쇼맨십이 충만한 악동이었다. 앞선 AMG의 기에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타이어를 태우며 새하얀 연기를 피우는 장난에 푹 빠져 있었다. 긴 보닛 안에는 셋 중에 가장 큰 V8 엔진을 품었다. 배기량 6162cc에 어떠한 과급기도 걸치지 않은 채, 본능에 충실한 V8 머슬카의 자존심이었다.

6.2 LT1 엔진은, 카마로를 비롯해 캐딜락 CTS-V, 쉐보레 콜벳 등 GM 스포츠카 심장의 계보를 잇는 V8 유닛이다. 독특한 점은 푸시로드를 이용해 밸브를 여닫는 OHV(Over Head Valve) 엔진이라는 사실. 일반적인 OHC(Over Head Camshaft) 엔진의 캠샤프트를, 푸시로드와 로커 암이 대신하기 때문에 엔진 부피와 무게는 줄어들고, 무게중심이 낮아진다. 비록 고회전을 넘볼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지만, 낮은 rpm에서 쏟아지는 풍만한 토크와 머슬카 특유의 그르렁대는 배기 사운드는 여느 V8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카마로의 콕핏은 수면 위를 가르는 제트보트의 선장실 같았다. 툭 튀어나온 보닛이 물 대신 공기를 날카롭게 가른다. 높은 벨트라인은 나를 봅슬레이 선수로 만들었다. 스티어링 휠을 붙잡자 결승전을 앞둔 국가 대표처럼 묘한 긴장감마저 감돈다.

도로를 나서면서 힙합 아티스트의 명곡으로만 플레이리스트를 채웠다. 왠지 카마로의 스피커엔 강렬한 비트와 베이스로 꽉 찬 힙합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스피커가 무용지물이 될 줄이야. 본격적인 질주에 시야는 좁아지고 귀는 닫혔으며, 닫힌 귀를 뚫고 들어온 노래는 힙합이 아니라 웅장한 V8 사운드였다. 마초의 함성은 심장 마사지를 하기에도 충분했다. 패들 시프트를 건드리지 않는 한 변속은 없다. 카마로는 철저히 드라이버 명령을 따랐다. 레드 존을 때리던 바늘이 뚝 떨어지면서 차체가 요동친다. 바꿔 문 기어는 드라이브 샤프트와 디퍼렌셜을 거쳐 뒷바퀴를 짓이겼다. 강한 스핀이 일어나려는 찰나, 쏟아지는 453마력을 겨우 말린 건 내가 아니라 자세 제어장치다. V8 클럽을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에, 나는 망아지의 고삐를 풀어주기로 했다. 화끈한 번아웃,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타이어 연기, 자유자재로 꼬리 치는 파워 슬라이드까지. 카마로는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세월의 흔적은 느껴지지만 카본과 가죽의 만남은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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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풀린 카마로가 아스팔트 낙서에 푹 빠져 있을 때, V8 클럽의 마지막 멤버가 가솔린을 들이켜고 있었다.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 스포츠는 탐욕스럽게 식탐을 드러냈다. 하지만 식탐만큼 감수성도 풍부했다. 빛나는 삼지창 엠블럼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알루미늄 금관악기로 날카로운 배기음을 연주한다. 보닛 아래 숨은 V8은 뮤지컬 무대 아래서 라이브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였다. 연주 실력으로 따지면 V8 클럽 중 단연 최고다.

그란투리스모의 F136 YK 엔진은 페라리와 마세라티의 협업으로 완성된 V8 유닛. 배기량 4691cc에 7500rpm까지 경쾌하게 돌아가는 고회전형 엔진이다. 물론 터보차저도 없지만, 가변 밸브 타이밍 기술과 실린더 마찰 감소 프로그램으로 드라마틱한 회전 질감을 강조했다. 파워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최고출력 460마력, 최대토크는 53.0kg·m로 0→100km/h를 4.8초 만에 돌파한다. 하지만 정작 실내는 여유로운 콕핏 형태다. 두꺼운 가죽으로 감싼 대시보드에 단조로운 버튼 조합.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만 여전히 사치스러운 인테리어가 마세라티의 자존심을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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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멀어진 두 녀석을 쫓아가려면 스포츠 모드가 필수였다. 버킷 시트를 다시 조절해 몸에 맞추고 스로틀을 활짝 열었다. 기어를 순식간에 바꿔 물고, 완벽한 rpm 보정과 함께 쏜살같이 가속 시작. 시선은 전방과 태코미터를 바쁘게 오갔고, 정확히 레드 존을 때리는 순간 V8 파워가 아낌없이 쏟아졌다. 앞선 둘처럼 날쌔고 빠르지만, 그란투리스모는 다른 길을 택했다. V8 클럽 중 가장 섬세하며 가속 과정은 끊임없는 메들리처럼 긴박하게 전개됐다. 드디어 카마로의 꼬리를 잡은 채, 코너에 접어들었다. 이미 스카이훅 서스펜션이 위기 상황을 직감했는지 탄탄하게 근육을 부풀렸다. 이제 남은 건 6피스톤 캘리퍼가 1890kg 차체를 세우는 일. 그란투리스모는 코를 처박고 아스팔트와 짧은 키스를 나눈 후, 가까스로 코너를 탈출했다. 그리고 접어든 직선주로. 1대당 2개의 머플러, 총 6개의 배기구에서 하나같이 총성이 울려 퍼졌지만, 그중 그란투리스모의 한 쌍이 나머지를 압도했다. 태코미터 바늘이 레드 존에 가까워질수록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바리톤 사운드는 소프라노가 이어받았고, 마세라티 협주곡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비록 관중은 사진기자를 포함해 5명. 그나마 투덜대던 사진기자는 박수 대신 귀를 막았다.

(좌) 요즘 AMG는 터보와 연애 중, (가운데) 카마로의 장난기를 받아줄 수 있을까?, (우) 분명히 이 안엔 떠돌이 악사가 있다

(좌) 요즘 AMG는 터보와 연애 중, (가운데) 카마로의 장난기를 받아줄 수 있을까?, (우) 분명히 이 안엔 떠돌이 악사가 있다

V8 클럽과 함께한 드라이브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총 900km에 육박하는 주행거리와 180ℓ가솔린을 불태웠던 여정. 단 3대의 쿠페가 총 24개의 실린더를 뜨겁게 달군 시간이었다. 지갑 사정을 생각하면 V8 클럽은 결코 만만한 데이트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AMG GT S의 강렬한 카리스마, 자유분방한 카마로의 넘치는 끼, 그란투리스모의 아름다운 배기 연주를 경험하면, 결코 헤어나오기 힘들다. 실로 가슴을 뛰게 했던 마성의 V8 클럽. “도대체 왜 저런 시끄러운 차를 타는 거야?”고 물었던 그녀의 질문에, 이 정도면 100점짜리 답안이 될까?

: 김장원 사진 : 최대일, 김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