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젤리의 ㅊㅊㅊ] 떠나는 겨울에게

오늘은 2월의 마지막 날. 길고 길었던 겨울을 청산하고 이제 곧 잠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 이번 [최젤리의 ㅊㅊㅊ]는 다가올 봄을 맞이하기에 앞서, 잠시 겨울을 추억해보는 볼거리로 준비했다. 음악, 영화, 드라마, 책 그 어떤 것 하나 놓쳐도 좋다. 그 중 하나만으로도 오랜 시간 후에 만날 겨울이 느껴졌다면, 그거면 된다.

Paint It Gold – Glen Check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어본 사람은 없을 지도 모른다. 꽤 중독성 있는 경쾌한 멜로디가 단단한 빙판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꽃보다 청춘-아이슬란드 편>의 배경음으로 쓰인 탓인지 당장 꽁꽁 얼어붙은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상쾌하고 차가운 매력을 타고난 겨울. 좋은 겨울을 기쁘게 추억하며 들어보기에 좋다.

FOOL – WINNER
성숙한 남자의 고백이라고 해야 할까. ‘멍청한 놈, 어리석은 놈, 다 내 탓이란 걸 이젠 알아’라고 절절히 부르는 가사와 세련된 멜로디가 귓가에 맴돈다. 헤어진 연인을 떠나 보내며 후회하는 한 남자의 심정이, 어쩐지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쓸쓸한 겨울, 헤어진 남녀에게 들려주는 네 남자의 슬픈 외침. 지난 4월에 발표한 곡이지만 텅 빈 겨울과 참 잘 어울린다.

You’ve Got A Friend in Me – Randy Newman
디즈니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봤다면 결코 모를리 없는 노래. <토이 스토리>는 1995년에 개봉한, 10년도 더 된 영화지만 지금도 노래의 나긋나긋한 멜로디를 들으면 장난감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앤디의 방이 떠오른다. 추운 바깥보다 따뜻한 집이 아직 더 좋은 이 때, 방구석에 편안히 누워 조용히 감상해보자. 영화를 안주 삼아 추억한다면 더 좋고.
고담 시즌 1
<고담>은 배트맨의 어린 시절을 다룬 드라마로 미국에선 현재 시즌 4가 방영 중이다. 영화 <배트맨>을 아직 보지 못했다면 더욱 권장하는 바, 배트맨이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과 그 배경을 낱낱이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윌 스미스의 아내로 알려진 피쉬 무늬 역의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매혹적이고 깊은 연기가 인상적이다. 피쉬 무늬만의 치명적인 대사 마디마디와 행동 하나하나가 드라마에 더욱 몰입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각종 범죄와 부패, 탐욕으로 가득한 도시 고담.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딴 이름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언제나 ‘열일’하는 제임스 고든이 형사로 재직하던 시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애들은 가라. 잔인하고 자극적인 요소가 또 하나의 빅 재미를 선사할 것.
오직 두 사람 – 김영하
<오직 두 사람>은 작가가 오랜 시간 써온 크고 작은 소설 모음집이다. <오직 두 사람> 외에도 <옥수수와 나>, <슈트>, <최은지와 박인수>, <아이를 찾습니다> 등 일곱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특히 <아이를 찾습니다>는 2014년 4월 우리나라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참혹한 비극에서 착안해 쓰인 소설이다. 끔찍한 파괴 속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더 망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허구답지 않은 허구로 묘사한다. 겨울과 어울리는 소설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스토리가 이끄는 묵묵하고 침체된 분위기가 춥고 시린 겨울과 매우 닮아서였다. 곧 떠날 겨울을 잠시 붙잡고 이 책을 천천히 읽어 보길 권한다. 마지막 겨울을 한껏 시리게 느꼈으면 좋겠다.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팩트 따윈 모르겠다.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271페이지).

약간의 거리를 둔다 – 소노 아야코
‘거리를 둔다’, 사람 사이를 뜻하는 단편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물론 그 뜻을 포함해 사물, 생각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무형의 존재를 아우른다. 이 책은 어떤 것이든지 멀찍이 떨어져 생각해봤더니 이렇더라. 는 작가의 생각을 모은 에세이다. 작가 자신의 생각이 온 세상을 드라마틱하게 바꿀 리 만무하지만, 책을 읽을 당신에게 꽤 색다른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다. 거리를 둠으로써 우리의 인생이 완벽히 변할 수 있다는 비약은 하지 말자. 그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각자의 인생이 단지 절망할 이유도, 마냥 행복할 필요도 없다는 것.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각자의 삶에 분명한 가치가 있다. 아담한 크기 덕분에 가방에 넣고 다니기 아주 좋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꼭 스마트폰이 아니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거다.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설국 사람들은 겨울의 혹독함 없이 봄은 여물지 않는다는 순리를 알고 있다. 도쿄의 겨울은 따뜻하기 때문에 그만큼 봄이 되어도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54페이지).나, 다니엘 블레이크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배경이 된 영국을 포함해 소외된 계층, 노동자, 이주민 등 전 세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당시 신인으로 처음 얼굴을 알린 헤일리 스콰이어의 덤덤하고도 애처로운 연기가 감정 몰입의 주요 포인트이기도 하다. 특히 굶주림을 참지 못해 정부로부터 수급받은 통조림 캔을 허겁지겁 입안에 쏟아붓는 장면에서는, 이 영화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화 속 과장된 연출이 아닌 소외 계층의 현주소로서 깊은 공감이 되었기 때문. 싱글맘 케이티에게 세상은 너무 어렵고 무서운 곳이다. 그렇지만 없는 형편에도 함께 나누고 돕는 이웃 다니엘이 있다. 영화는 이들을 대변해 나라의 차가운 현실을 철저히 꼬집는다. 강한 여운과 진한 감정이 혼재했던 영화. 시린 겨울과 너무나 닮았다.

[최젤리의ㅊㅊㅊ]는 라이프스타일을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볼거리에 대해서, 한 달에 한 번 기어박스 피처 에디터가 직접 읽고 보고 들은 책,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을 소개한다. ‘ㅊㅊㅊ’는 츤츤한 본인의 성격과 ‘책 추천’의 초성을 사용해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말. 어딘가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불특정 다수에게 작은 위로가, 또 하나의 행복을, 예상 밖의 즐거움이 될 [최젤리의ㅊㅊㅊ]. 잘 부탁해♥
최수련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 어디쯤.
sueryun@gearba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