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포츠카, F1 서킷을 달리다

2nd Anniversary of car magazine

오직 영국 출신이라는 자부심으로 한데 뭉친 스포츠카. 이름도 체급도 모두 다르지만, 치명적인 매력으로 영암 F1 서킷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매력 진한 영국 출신 가수들이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해 전 세계 각지에서 뜨거운 인기를 누린 현상을 말한다. 시작은 비틀스였다. 1964년 비틀스의 <I want hold your hand>라는 노래가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 한 달도 채 안 돼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비틀스에 이어 더 후(The Who),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삼파전을 이루며 젊고 개성 넘치는 영국 록 밴드가 전성기를 맞았고, 3강 구도를 이룬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딥 퍼플(Deep Purple)은 더욱 강렬한 사운드와 자극적인 퍼포먼스로 제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켰다. 그들의 음악은 파격적이었다. 더불어 영국 록 밴드의 자유로운 스타일과 감각적인 패션을 넘어 그들의 취향과 인생 자체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자동차 역사에서도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일었다. 와트의 증기 기관 개발을 시작으로, 백야드 빌더의 근원지이자 산업혁명의 현장인 영국에서 수많은 자동차 제조사가 탄생하고 발전했다. 수많은 그랑프리에서 아름다움과 빠른 속도로 위용을 떨친 재규어, 최초의 실용적인 소형차이자 랠리에서 모두를 놀라게 한 미니, 살아 있는 오프로더의 전설 랜드로버, 오직 경량을 고집한 순수한 스포츠카 브랜드 로터스까지. 모두가 영국을 대표하는 로열패밀리다.

우리는 <car> 매거진 한국판 창간 2주년을 맞아 자부심 넘치는 영국 브랜드를 정식으로 초대했다. 대개는 라이벌을 모아놓고 우열을 가리는 비교 시승 기회가 많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오직 영국차를 위한 유쾌한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는 영국 브랜드를 대표하는 스포츠카를 지목했으며, 지난 2010~2013년 우리나라에서 F1 그랑프리가 치러진 영암 국제자동차경주장(KIC)으로 그들을 초대했다. 재규어와 랜드로버가 흔쾌히 참석했고, 이어서 미니와 로터스가 참가 소식을 알렸다.

그들은 영국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빼면 닮은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크기와 디자인은 물론 엔진 배기량과 과급 방식까지 모두 달랐으며, 심지어 로터스와 랜드로버의 무게는 1400kg이나 차이 났다. 그러나 영암 F1 서킷에 들어선 4대의 영국차는 속도와 스릴을 즐기는 쾌락주의자이며, 서킷을 너무나 사랑하는 열혈 스포츠카다.

첫 번째 주인공은 작지만 터프한 미니 JCW다. 새빨간 칠리 레드 컬러에 체커기 패턴을 곳곳에 두르고 경쾌한 엔진 사운드로 존재감을 알렸다. 존 쿠퍼 웍스(John Cooper Works)는 본래 영국의 레이스카 제조사였다. 작은 미니를 랠리 챔피언으로 만든 주역이며, 현재는 BMW 그룹에 속해 미니의 고성능 모델과 다양한 튜닝 부품을 제작한다. 이날 함께한 빨간 미니 역시, 쿠퍼 S를 기반으로 JCW가 매만진 최상위 모델이다. 작지만 매콤하고 언제나 유쾌한 핫 해치의 대명사로 통한다.

두 번째 주인공은 아름다운 재규어 F-타입이다. 전설적인 E-타입의 명예를 이어받은 스포츠카로, 이안 칼럼의 예술적인 디자인과 재규어의 다이내믹한 퍼포먼스의 조화가 일품이다. 재규어는 F-타입과 함께 브랜드 이상을 달성했다. E-타입처럼 앞으로 열리는 보닛과 스마트 키에 반응하는 플러시 도어 핸들은, 영국 스포츠카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세 번째 주인공은 사연이 있다. 우리는 먼저 서킷에 어울리는 랜드로버로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을 꼽았다. 비록 SVR은 큰 키와 육중한 몸무게를 가졌지만, 흉포한 힘과 토크로 아스팔트를 뜯어버리기 제격이었다. 하지만 SVR은 결국 서킷에 올 수 없었다. SVR은 멋진 전시장에서 서식하고 있었고 하필 그 전시장이 3층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레인지로버 스포츠 중 가장 날렵하고 강력한 HSE 다이내믹이 우리와 함께했다.

마지막 주인공은 레인지로버 스포츠에 비교하면 깃털처럼 가벼웠다. 둘이 나란히 서면 마치 하마와 하마의 목욕을 책임지는 작은 새처럼, 서로 공생 관계로 살아가는 천생연분 같았다. 엘리스는 로터스의 아이콘이자 경량 스포츠카의 대표 주자다. 이날 함께한 엘리스 스포트 220은 무게가 고작 914kg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에 반해 출력은 220마력이다. 무게당 출력 비율로 따지면, 1kg당 4.14마력으로 여기 모인 4대 중 가장 뛰어나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무하마드 알리의 펀치도 로터스 앞에선 무딜 것이다.

보기와 다르게 편안한 재규어의 콕핏. 서울에서 영암까지도 문제없다

서킷은 추운 겨울 날씨 탓에 고요하다. F1 머신과 수많은 관중이 열광했던 장소는 관중 대신 적막함으로 가득했다. 아스팔트는 차게 굳어 있었고 전날에 내린 눈이 녹아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재규어 F-타입으로 트랙에 뛰어들었다. 먼저 주행 모드를 다이내믹으로 바꿨지만 자세 제어 장치는 켜두었다. 영하의 날씨와 아직 노면 상태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입한 일종의 보험이랄까? 제아무리 4륜구동이라 한들, 아름다운 F-타입과 함께 잔디밭에 처박히기는 싫었다. 목청을 키운 F-타입은 고요한 서킷을 배기음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독주. 직선주로에서 3.0ℓ 슈퍼차저 엔진이 아낌없이 힘을 쏟아낸다. 예상외로 그립은 충분했다. 간혹 계기반에서 자세 제어 장치가 깜빡거렸지만, 재규어의 발톱처럼 타이어는 아스팔트를 낚아챘다. 이어지는 감속. 패들 시프트를 정신없이 당겼고 그때마다 머플러에선 폭발음이 작렬한다.

주의! 스핀 하지 않으려면 오른발을 봉인해야 한다

F-타입을 코너 중심으로 내던졌다. 깊은 헤어핀 코너를 미끄러지며 접어들었고 이제 코너를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현재 2단, 스핀을 경계하며 가속 페달에 조금씩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가 열릴 즈음, 갑자기 뒷바퀴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위기는 너무 빨리 찾아왔다. 재빨리 핸들을 반대로 돌리고 액셀에 힘을 풀었지만, 나보다 자세 제어 장치가 먼저 뒷바퀴를 진정시켰다. 나는 전략을 바꿔야 했다. 타임 어택이 아니라 성난 F-타입을 달래가며 코너를 공략해야 했다. 다시 2단, 그립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코너를 탈출하며 시선을 멀리 고정했고, 선회가 끝날 때까지 인내심이 필요했다. 마침내 시야가 넓게 열렸다. 엔진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고 네 바퀴가 토크를 쏟아낸다. 부드럽게 가속했지만 뒤 타이어는 다시 미끄러진다. 그래도 아직 여유가 있다. 차체 움직임이 점진적이고 그립을 예상할 수 있다. 운전자는 오버스티어와 스핀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다. 결국, F-타입은 끈기 있게 횡 G를 이겨냈다. 이따금 자세 제어 장치가 개입했지만, 산통을 깨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짜릿함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레인지로버 스포츠로 갈아탔다. 이 덩치로 헤어핀을 통과할 생각에 망설여졌지만, 재규어의 심장과 같은 3.0ℓ 슈퍼차저 엔진은 쾌속 질주를 이어간다. 덩치만 컸을 뿐, 다를 건 없다. 스티어링 휠에 달린 패들 시프트, 경쾌한 스포츠 모드가 흥을 돋운다. 높은 차체는 공기를 가르기에 방해가 됐다. 그러나 다음 코너까지 노려볼 수 있는 광활한 시야를 제공했다. 브레이크는 2.3t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변속은 경쾌하게 이뤄지고 겁도 없이 코너를 향해 몸을 던진다. 예상대로 덩치는 미끄러졌다. 다만 F-타입이 스핀을 두려워했다면, 레인지로버는 끊임없는 언더스티어와 싸워야 했다. 그래도 네 바퀴가 일으키는 트랙션은 대단했다. 바깥으로 미끄러지다가도 금세 자세를 다잡고 코너를 박차고 나온다.

둘의 질주는 한동안 주목받았다. SVR이 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에어 서스펜션은 큰 덩치를 받치느라 근육을 잔뜩 부풀렸다. 이리저리 쏠리며 횡 G와 싸우는 와중에 거친 충격까지 걸러냈다. 이토록 편안하게 F1 서킷을 달리는 차가 있을까? 쓸데없는 사치를 누리며 나는 가속 페달을 바닥까지 밟았다. 그러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뻗어가는 레인지로버 스포츠. 슈퍼차저 엔진은 거침없이 340마력을 쏟아냈고, 이 순간만큼은 SUV가 아니라 F-타입처럼 뻗어 나갔다.

서킷에서도 핫 해치의 매콤한 성능이 돋보였다

한편, 추운 날씨와 차가운 아스팔트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트를 빠져나간 JCW. 당돌한 미니 JCW가 랩타임 신기록을 세우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빨간색 보디와 귀여운 눈망울을 가진 미니, 하지만 울려 퍼지는 엔진 사운드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나는 스포츠 모드로 고정하고 기어 레버를 당겨 수동으로 조작했으며 자세 제어 장치조차 해제했다. 그야말로 JCW에 자유를 허락한 셈. 미니도 나도 오늘만큼은 일탈을 꿈꾸며 출발했다.

미니는 모든 게 경쾌했다. 출발, 가속, 감속, 선회 그리고 다시 가속까지, 레인지로버에서 미니로 갈아탄 탓에 마치 발목에 달린 모래주머니를 벗겨낸 것처럼 날렵했다. 1998cc는 숫자에 불과하다. 순식간에 뻗어 올라가는 태코미터 바늘이 레드존에 다다를 때마다 231마력을 뿜었다. 아담한 콕핏은 금세 바람 소리로 가득 찼다. HUD는 화려한 그래픽으로 변속 시기를 알려주었고, 패들 시프트를 당길 때마다 변속 충격이 일었다. 어느덧 미니는 진지해졌다. 배기음을 연주하는 테일 파이프, 적극적인 기어 변속, 탄탄한 댐퍼와 노면을 탐색하는 스티어링 휠까지 장난기 싹 걷어낸 모습으로 서킷을 공략해 나갔다. 하지만 나는 미끄러운 노면을 걱정하며 미니를 달랬다. 앞서 F-타입이 허둥지둥하며 미끄러졌던 고속 코너를 앞두고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렸다. 그런데도 너무 빨랐다. 분명 미끄러질 게 뻔했다. 하지만 미니는 주저 없이 앞머리를 잡아 틀었다. 그러자 타이어가 살려달라고 난리다. 늘 카트 같은 핸들링을 고수했던 미니가 언더스티어에 시달렸다. 서울에서 신호등 레이스만 즐겼던 미니도 조금 놀란 눈치다. 반대로 앞바퀴에 무게를 잔뜩 실으면 뒤쪽이 살살 미끄러졌다. 미니는 오랜만에 위기를 경험했지만 정작 즐기는 분위기랄까? 빨간 핫 해치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속도에 몸을 맡겼다.

서킷에 들어서자 엘리스는 날뛰었다. 왜냐고? 너무 신나서

미니의 브레이크가 달아올라 휴식이 필요할 즈음, 이미 많은 기자에게 웃음꽃을 선사한 로터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엘리스를 실컷 탄 기자는 나에게 충고했다. “진짜 끝내주게 재밌어. 그런데 방심하면 끝이야!” 사실, 아까 F-타입 룸미러를 통해 미끄러지는 엘리스를 보았다. 그것도 360°로 팽그르르….

요가 하듯이 몸을 구부려야 한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다

공차중량 914kg, 최고출력 220마력. 쾌감지수 무한대

엔진은 이미 뜨거웠지만, 여전히 기어 레버는 차갑다. 이 추운 날씨에 알루미늄은 별로 반갑지 않다. 하지만 막상 서킷에 접어들자 차가운 줄도 몰랐다. 가속하고 감속하는 사이 바쁘게 기어 레버를 만지작거렸지만, 차갑기는커녕 짜릿할 뿐이다. 1단에서 2단, 2단에서 3단. 철컥철컥 기어가 들어갈 때마다 엘리스는 활시위를 빠져나간 화살처럼 쏜살같이 치고 나갔다. 엘리스는 1.2km에 육박하는 직선주로에서 불을 뿜었다. 감속 과정은 더 드라마틱하다. 기어를 차례대로 내릴 때마다 자극적인 배기 사운드가 치솟았고, 클러치를 붙일 때마다 뒤 타이어가 가까스로 그립을 찾았다. 가벼움은 엘리스의 최대 무기다. 앞서 F-타입과 미니가 여지없이 미끄러졌던 코너를 끈질기게 버텨냈고, 언더스티어나 오버스티어 현상은 현저히 덜했다. 심지어 뒷바퀴가 살짝 미끄러져도 카운터 스티어만으로 금세 균형을 찾는다. 바닥에 딱 달라붙어 달리는 엘리스의 운전 재미는 롤러코스터의 곱절이며, 타이어 온도가 오를수록 흥분을 더했다. 과연 트랙에서 이보다 짜릿한 스포츠카가 있을까? 페라리? 람보르기니? 나라면 주저 없이 엘리스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매력 넘치는 영국 스포츠카와 멋진 하루를 보냈다. 영국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지만, 그들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유혹했으며 이날만큼은 우열을 가리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의 열정만큼 뜨거웠으며, 우리는 개성 있는 영국차에 푹 빠져들었다. 앞으로도 영국 스포츠카의 침략이라면 언제든 대환영이다.


Mini JCW

Price 4980만 원
Engine 1998cc I4 가솔린 터보, 220마력@6800rpm, 32.7kg·m@1250~4800rpm,
Transmission 6단 자동, FWD
Performance 0→100 6.1초, 246km/h, 11.9km/ℓ, CO₂ 146g/km
Weight 1310kg

Land Rover Range Rover Sport

Price 1억4070만 원
Engine 2995cc V6 가솔린 슈퍼차저, 340마력@6500rpm, 45.9kg·m@3500~5000rpm,
Transmission 8단 자동, AWD
Performance 0→100 7.2초, 209km/h, 7.4km/ℓ, CO₂ 231g/km
Weight 2315kg

Jaguar F-Type Coupe AWD

Price 1억3710만 원
Engine 2995cc V6 가솔린 슈퍼차저, 380마력@6500rpm, 46.0kg·m@3500~5000rpm,
Transmission 8단 자동, AWD
Performance 0→100 5.1초, 275km/h, 8.5km/ℓ, CO₂ 200g/km
Weight 1800kg

Lotus Elise Sport 220

Price 7080만 원
Engine 1798cc I4 가솔린 슈퍼차저, 220마력@6800rpm, 25.5kg·m@4600rpm,
Transmission 6단 수동, RWD
Performance 0→100 4.6초, 234km/h, 7.5km/ℓ, CO₂ 173g/km
Weight 914kg

김장원 | 사진 최대일, 김범석

김장원

너무 진지할 필요 없어요. 쉽고 즐거운 자동차 이야기를 조명합니다.
bejangwon@carmagazi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