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9이 짊어진 이름의 무게

2세대로 진화한 기아차의 플래그십은 모든 면에서 단점을 찾기 어려운 뛰어난 자동차다. 한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와, 뭐 이런 색도 다 있어?” 애프터마켓에서 따로 도색해야 할 것만 같은 색깔의 K9을 보고 나온 첫 마디였다. 우리말로는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오묘한 색깔이지만, 청옥색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기아차는 응축된 고급스러움과 품격의 무게를 컨셉트로 K9을 디자인했다고 설명하는데, 자칫하면 플래그십의 위엄을 해칠 수 있는 무리한 시도 아닌가?

아니다. 이런 호기로운 도전이 좋다. 대형 세단에 화려한 색깔을 입힌다고 해서 품격을 잃는다는 생각은 버리자. 언제까지 특색 없는 무채색만 고집할 텐가. 단언컨대, K9은 온라인에서 보는 것보다 실물이 훨씬 멋지고 웅장하다. 기회가 되면 전시장에서 직접 보고 만져보고 앉아보길 권한다. 나도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못생겼다며 투덜거렸으니 말이다.

광택이 은은하게 맴도는 표면은 매끄럽기 그지없고 우아한 굴곡이 차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풍성한 볼륨감의 차체 옆면을 가로지르는 캐릭터 라인이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덩치에 역동성을 불어 넣는다. 1세대 K9보다 앞뒤 바퀴를 끝쪽으로 조금씩 더 밀어 넣어 만든 자세와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루프 라인이 권위적인 플래그십에 호기로운 기질을 더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19″ 크롬 스퍼터링 휠도 멋들어진 분위기를 만드는 일등공신. 제네시스 EQ900를 통해 선보인 적 있는 타이어 공명음 저감 기술을 적용한 휠이다. 잘 달릴 만한 자세는 충분하다.

같은 그래픽으로 섬세하게 매만진 앞뒤 LED 램프 속 우아하게 자리 잡은 주간 주행등과 궤적을 따라 흐르는 방향지시등도 일품이다. K9에 어울리게 다듬은 호랑이 코 그릴 위에는 다른 기아차 모델과 차별화된 와인 빛 그라데이션의 KIA 엠블럼이 고이 놓여 있다. 산통이 깨지는 순간이다.

나날이 발전 중이다. 개성도 진해졌으면 좋겠다

신형 K9 출시에 앞서 현대차의 제네시스처럼 기아차 별도의 고급 브랜드 출범 여부를 놓고 수많은 얘기가 떠돌았다. 이미 플래그십 SUV 모하비와 스포츠 세단 스팅어를 통해 별도의 엠블럼을 선보인 적 있기에,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기아차는 단호했다. K9은 기아차 브랜드의 위상을 높여줄 플래그십 역할을 맡을 것이며, 새로운 고급 브랜드 론칭은 준비되지 않았다는 설명이었다. 제네시스 역시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는 이르다. 당연히 기아차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K9을 경험할수록 아쉽고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차 자체는 훌륭하지만, 뗄 수 없는 기아 엠블럼 때문이다.

호화롭고 품질 좋은 실내. 다른 브랜드 차가 생각난다고?

방향지시등을 켜면 나오는 영상.
시선 처리에 좋진 않다

고급스러운 품격은 실내에 가득하다. 고급 대형 세단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나 장인 정신 가득한 품질의 실내를 자랑하는 렉서스 못지않다. 시승차는 베이지 투톤 컬러의 인테리어로, 넓은 공간에 밝은 분위기가 한결 더 하다. 인테리어를 이루는 소재는 다채롭고 호화롭다. 품질 좋은 가죽과 원목, 매끈한 금속과 퀼팅 패턴을 아낌없이 둘러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뽐낸다.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를 의식한 모양새의 인테리어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EQ900보다 간결하고 안정감 있다. 수평 레이아웃 대시보드에는 동일한 크기의 12.3″ 고해상도 계기반과 센터패시아 모니터가 달렸다. 널찍한 화면에 보여주는 정보는 풍성하고 알차며 조작하기도 쉽다. 주행 모드에 따라 계기반 그래픽이 눈에 띄게 변하고, 센터 모니터는 화면을 분할해 필요한 정보를 둘로 나눠 볼 수도 있다. BMW i 드라이브가 생각난다. 나만 그런가?

완성도 뛰어난 최신 운전자 주행 보조 장비가 한가득이다

스위스의 럭셔리 시계 메이커인 모리스 라크로와와 협업해 만든 아날로그 시계가 센터패시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고, 야간에 센터패시아로 손을 가까이 가져가면 버튼의 조명이 밝아지는 등 환대받는 느낌이 든다. 실내를 은은하게 감싸는 앰비언트 라이트 역시 미국의 권위 있는 색채 연구 기업인 팬톤 색채 연구소와 함께 개발한 것이다. 총 64가지 색상을 고를 수 있으며,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7종의 컬러를 추천해준다. 자연과 우주에서 영감 받아 만들었다는데, 빛이 요란하지 않아 정말 그런 기분도 든다.

K9과 함께 서울 시내를 누볐다. 자연흡기 엔진을 품은 3.8ℓ 플래티넘과 5.0ℓ 퀀텀 트림도 있지만, 가장 합리적인 건 3.3ℓ V6 트윈 터보 엔진을 품은 마스터즈 트림. 전자제어 서스펜션 위에 놓인 차체는 나긋나긋 부드럽게 달린다. 함께 어울린 8단 자동변속기도 부드럽게 기어를 바꿔 물며 기분 좋은 승차감을 만든다. 수시로 앞뒤 바퀴에 동력을 나누는 4륜구동 시스템이 있지만, 평소에는 존재감이 희미하다. 요즘은 플래그십 세단이라고 해서 무조건 푸근한 승차감만 강요하진 않는다. 한없이 풍요롭다가도 달릴 때는 댐퍼를 잔뜩 조여 탄탄한 느낌을 선사하는 시대다. EQ900보다 좀 더 탄탄한 실력을 보여주는 신형 K9은 BMW 7시리즈와 비슷한 감각이다. 특히, 스포츠 모드로 돌려두고 가속 페달을 때려 밟을 때 그렇다. 이중유리와 언더커버 등 흡·차음재를 풍성하게 써서 한없이 고요하던 실내에 매섭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엔진음이 들려온다. 소리를 증폭해 스피커로 들려주는 액티브 엔진 사운드다. 4륜구동 시스템도 비로소 빛을 발한다. 앞바퀴에 더 적극적으로 힘을 보내며 열띤 질주를 안정적으로 돕는다. 체형에 맞춰 최적의 운전 자세를 알려주는 시트는 이미 옆구리를 바짝 조인 상태. 많은 요소가 어울려 더 달려보길 권하지만, K9은 줄기차게 달리는 차가 아니지 않은가.

다시 돌아온 컴포트 모드. 크루즈 컨트롤을 켜두니, 그제야 풍성한 전자 장비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의식하지 못할 만큼 K9 스스로 차로 가운데를 유지하며 달렸고, 앞차와 거리를 안정적으로 조절했다. 갑자기 앞으로 치고 들어온 아우디를 피하는 건 내 몫이었지만 말이다. 터널을 앞에 두고는 스스로 창문을 닫기도 했다. 생소한 건 방향지시등을 켜면 계기반으로 바깥 사각지대 영상을 보여주는 후측방 모니터 기술이다. 처음엔 신기해서 자주 들여다봤는데, 사이드미러를 향해 눈을 돌리는 것이나 계기반을 보는 거나 큰 차이는 없었다. 미래에 사이드미러 없는 차가 나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뒷좌석 승차감을 느껴보기 위해 일부러(?) 술 약속을 잡고 대리운전 기사님께 전화를 걸어 집으로 향했다. 한없이 널찍한 뒷좌석은 고급 라운지 느낌이 물씬하다. VIP 가죽 시트는 푸근하고 발 놀릴 공간은 여유롭다. 센터 암레스트에 달린 버튼 하나로 나만의 소파를 만들 수 있다. 취기가 오르고 몸이 축 처져서 뜨끈뜨끈한 열선까지 켜두니 찜질하며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다. 길이 뻥 뚫려 있으니 기사님이 자연스레 속도를 올린다. 노면으로 가라앉는 기분의 승차감은 충분히 편안하다. 플래그십 세단 오너들의 기분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끼는 사람을 뒤에 태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형 K9의 가격은 5490만~9330만 원에 이른다. 시승차는 6650만~8230만 원의 마스터즈 트림 중 최상위인 그랜드 마스터즈 트림. 시승차에 들어간 모든 옵션을 더하면 8610만 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수입 플래그십 세단을 타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지만, 동급의 EQ900와 비교하면 3070만 원이나 싸다. 차체 사이즈와 실내 공간의 차이는 있지만, 합리적인 가격으로 플래그십을 누리고 싶다면 K9이 제격이다. 그럼 플래그십을 눈여겨보던 당신의 눈에 K9이 들어올까? 그쯤 되면 브랜드 가치도 따져보기 마련. 이것저것 재가며 고민하던 당신은 EQ900나 E-클래스 또는 5시리즈에 마음이 기울지도 모른다. K9과 함께하며 아쉬웠던 가장 큰 이유다.

LOVE  평균을 웃도는 기술과 이상적인 가격

HATE  기아차의 플래그십으로는 아깝다

VERDICT  합리적인 플래그십 세단

Kia K9 3.3 T-GDi Masters

Price 8230만 원

Engine 3342cc V6 가솔린 터보, 370마력@6000rpm, 52.0kg·m@1300~4500rpm

Transmission 8단 자동, AWD

Performance 0→100 N/A, N/A, 8.1km/ℓ, CO₂ 213g/km

Weight 2085kg

이세환 사진 김범석

이세환

사람과 자동차, 당신의 이야기와 우리의 자동차를 함께 나누고픈 1인
serrard@carmagazi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