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이 사랑한 초호화 4×4

‘강남 싼타페’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레인지로버. 2억 원에 육박하는 레인지로버가 싼타페처럼 많이 돌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래 레인지로버의 애칭은 ‘사막의 롤스로이스’다. 롤스로이스처럼 고급스러운 콕핏에서 사막을 거침없이 누빌 수 있는 유일한 SUV라는 의미다. 하지만 한국에선 ‘강남 싼타페’라고 불린다. 품질로 따지면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데다 가격을 따지면 무려 3배 가까이 차이 나지만, 싼타페만큼 많이 굴러다녀서다. 가파른 경사로도 없으며 심지어 모든 도로가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포장된 가로수길이나 한남동 골목은 레인지로버의 주요 서식지다. 하지만 레인지로버는 개의치 않는다. 전자동 지형 반응 시스템 2, 로 트랙션 론치, 내리막길 주행 제어 장치 등 화려한 오프로드 기술을 자랑하기 바쁘다. 경이로운 오프로드 성능이 무용지물이 되는 서울에서 레인지로버는 어떻게 일인자가 되었을까?

사실 레인지로버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 이유를 알 만했다. 담대한 자태와 진지한 표정, 거대한 풍채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거구가 거리로 나가면 웬만한 SUV는 오징어로 만들어버린다. 하물며 세단이나 해치백은 꼴뚜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운전석에 앉으려면 마치 계단을 오르듯 도어 실을 밟고 올라야 한다. 일단 앉으면 세단 잔챙이를 짓밟아버릴 수 있으니 힘겨워도 특권이라 생각해야 한다.

최근 페이스리프트를 단행한 레인지로버는 외관에 정교함을 더했다. 헤드램프는 화려한 LED를 듬뿍 채워 정교하게 다듬었다. 레인지로버 스포츠의 헤드램프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면 발광 타입 주간주행등과 순차적으로 빛나는 시그널 램프는 24시간 화려한 강남의 밤거리와 닮아있다.

스타일 핵심은 역시 클래식과 심플함이다. 오랜 역사에 비하면 여전히 각진 형태와 면을 강조한 실루엣을 고집했고, 실험적인 시도를 배제한 안전한 디자인이다. 따라서 페이스리프트의 변화도 소소하게 이뤄졌다. 기본적인 헤드램프와 테일램프를 수정하고 새로운 그릴과 에어 벤트 피니시를 조금 손봤을 뿐이다. 이토록 소극적인 변화임에도 여전히 강남 부호들은 레인지로버를 사랑한다. 아니, 오히려 소극적인 변화가 더 반가울지도 모른다. 그들은 옛 모습을 버린 디스커버리를 두고 맹비난 했으니까.

벨라의 탐스러운 터치스크린이 그대로 올라갔다. 그래픽은 깔끔한데 반응 속도가 조금 아쉽다

페이스리프트의 핵심은 외관이 아니라 인테리어에 있다. 바로, 레인지로버 벨라에서 처음 선보인 인컨트롤 터치 프로 듀오가 주인공이다. 프리미엄 브랜드는 고유의 인포테인먼트의 조작 방법을 두고 신중하게 접근하는데, 랜드로버가 선택한 방법은 터치 방식이다. 터치의 장점은 디자인 자유도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수많은 버튼을 모조리 날려버릴 수 있으니 한결 깔끔한 인테리어를 제안할 수 있다. 한편 아날로그의 장점은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이며 조작 여부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레인지로버는 둘 사이에서 장점만 챙겼다. 위아래로 2개의 터치스크린과 더불어 다이얼을 여전히 남겨두어 보수적인 운전자를 배려했다. 실제로 조작은 어렵지 않다. 처음엔 적응이 필요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다. 인테리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조작하기 편하도록 각도가 조절되는 상단 스크린에서 랜드로버의 센스가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폰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반응 속도가 조금 답답할 수도 있다.

스티어링 휠 리모컨도 손가락 터치에 반응한다. 오디오 볼륨을 높이고 싶을 땐 빙글빙글!

랜드로버의 전략은 점점 럭셔리로 향하고 있다. 벌써 네 가지로 세분화된 레인지로버 라인업만 보더라도 지향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플래그십이라 할 수 있는 레인지로버와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무결점 인테리어를 넘어 사치스러움에 가깝다. 질 좋은 가죽과 고급스러운 우드 트림의 조화, 은은하게 빛나는 알루미늄 트림과 앰비언스 라이트조차 부호들의 깐깐한 기준을 충족한다. 감성뿐만 아니라 내실도 더했다. 새로운 시트 프레임과 시트 충전재를 개선해 안락한 승차 공간을 제공한다.

인포테인먼트, 우드, 알루미늄 그리고 가죽. 모든 게 럭셔리

레인지로버와 레인지로버 스포츠의 차이는 크지 않다. 에어 벤트의 소재와 기어 레버의 형태를 달리하고, 레인지로버는 푸근한 시트,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좀 더 단단한 시트를 올렸다. 둘 모두 안락하고 럭셔리한 콕핏을 지향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살짝 다르다. 레인지로버 스포츠가 도시적이고 세련됐다면, 레인지로버는 여전히 보수적이며 한결 고급스러운 품격을 느낄 수 있다.

페이스리프트와 함께 새로운 기능도 눈에 띈다. 시트에 적용된 핫스톤 마사지(Hot-stone Massage) 기능은 총 15개의 핫스톤 셀로 엉덩이와 허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다.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따뜻한 기운은 좋지만 여전히 바디프렌드와 비교해선 안된다. 또한 루프 블라인드를 손동작으로 조작할 수 있다. 뒤로 휘저으면 열리고 앞으로 휘저으면 닫히는 식이다. 신기하기는 한데 굳이 버튼을 두고 손을 휘저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럭셔리 SUV라고 꼭 유행에 민감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새로운 레인지로버와 레인지로버 스포츠를 몰고서 서울 도심을 누볐다. ‘강남 싼타페’에 어울리는 반듯한 도로와 깨끗한 환경 속에서 진짜 매력을 다시 평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레인지로버 역시 그러길 바랐다. 21″ 휠에 편평비가 낮은 타이어는 평평한 아스팔트에 더 잘 어울렸다. 레인지로버는 큰 덩치임에도 가뿐하게 치고 나갔다. 비대한 차체와 무거운 몸을 이끌고도 V8 엔진이 사치스러운 무게를 상쇄시킨다. 가속 과정은 흡사 거대한 요트처럼 풍요롭고 부드럽게 전개된다. 쑥쑥 오르는 속도계는 최대토크 75.5kgm의 결과물이다. 정교하게 힘을 쏟아내는 시퀀셜 터보차저를 활용해 최고출력 339마력을 발휘하며, 0→100km/h를 단 6.9초 만에 도달한다. 동행했던 레인지로버 스포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실린더 2개를 줄였지만, 언제나 화끈한 기력으로 쏜살같이 미끄러진다(306마력, 71.4kgm).

기어 레버를 스포츠 모드로 옮기거나, 드라이브 모드를 다이내믹에 고정하면 화끈한 한방을 맛볼 수 있다. 아니면 패들 시프트를 자극하며 경쾌한 변속 과정을 만끽하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다. 하지만 문제는 거대한 덩치가 지나치게 품위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힘센 엔진은 언제나 느긋하게 반응하며 부드러운 변속기가 자꾸만 기어를 올린다. 그럼에도 여전히 스포츠 세단을 앞지르고 달린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편, 시승차 둘 모두 에어 서스펜션을 갖추고 있지만 성격은 조금 달랐다. 레인지로버가 하염없이 구름 위를 산책하는 느낌이라면,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탄력 있는 러닝화를 신고 달리는 기분이다. 물론, 부호들에겐 레인지로버의 승차감이 더 마음에 들 것이다. 하지만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사뭇 진지하게 응답한다. 코너로 접어들 때 속도와 횡G를 분석하고, 타이어 그립은 얼마나 남았는지, 댐퍼는 얼마나 수축하고 이완했는지, 고민의 과정을 충실하게 운전자에게 보고한다. 여전히 푸근한 에어 서스펜션을 채택했지만, 고속으로 질주할 때 끈적한 탄력과 반응으로 운전의 재미를 살려준다.

수많은 지형을 꿰뚫고 있는 전자동 지형 반응 시스템은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다. 그저 ‘오토’에 고정한 채 강남대로를 쏘다녀도 위기에 빠질 일은 없기 때문이다. 설령 갑자기 폭설이 내린다 해도 레인지로버 스스로 트랙션을 조절하거나,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서울시 제설차가 도로를 정리할 것이다. 이처럼 흘러넘치는 파워와 뛰어난 오프로드 기량은 서울에서 사치에 가깝다. 하지만 이게 곧 레인지로버의 진짜 매력이다. 지갑이 두둑하면 굳이 물건을 사지 않아도 쇼핑이 즐거운 것과 같은 이치다.

LOVE  커다란 덩치, 넘치는 파워, 럭셔리한 실내

HATE  자꾸만 허공에 손을 휘젓게 만드는 선루프

VERDICT  결핍 없는 4×4 황금 마차

Range Rover SDV8 Vogue SE

Price 1억8750만 원

Engine 4367cc V8 터보 디젤, 339마력@3500rpm, 75.5kg·m@1750~2250rpm

Transmission 8단 자동, AWD

Performance 0→100 6.9초, 218km/h, 8.0km/ℓ, CO₂ 248g/km

Weight 2650kg

Range Rover Sport SDV6 Autobiography Dynamic

Price 1억5530만 원

Engine 2993cc V6 터보 디젤, 306마력@3750rpm, 71.4kg·m@1500~1750rpm

Transmission 8단 자동, AWD

Performance 0→100 7.3초, 225km/h, 10.7km/ℓ, CO₂ 181g/km

Weight 2395kg

김장원 사진 김범석

김장원

너무 진지할 필요 없어요. 쉽고 즐거운 자동차 이야기를 조명합니다.
bejangwon@carmagazi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