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세라티 르반떼 트로페오와 함께 춤을

눈으로 뒤덮인 하얀 세상에 최상위 포식자가 나타났다. 누구보다 빠르고 과감하다. 우리는 그저 그를 믿고 가속 페달을 밟기만 하면 됐다. 물론, 스티어링 휠도 돌리면서 말이다

올겨울은 어느 때보다 건조하게 느껴진다. 눈 내리는 날도 적고 비도 가끔 왔을 뿐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하늘은 잿빛 미세먼지로 뒤덮였고 하늘이 파랗게 보일 때면 온도가 너무 내려갔다. 운전하는 입장에서 ‘눈’은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출퇴근 시간의 정체는 둘째치고 깔끔하게 차를 유지하는 입장에서도 ‘세차’라는 미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더 싫다. 촬영이라도 잡힌 날에 눈이나 비가 내린다면 정말 우울해진다.

4륜구동 SUV 라면,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무언가 잡아낼 수 있겠지만, 그 외 자동차는 사진기자(선배)에게 핀잔을 듣는 날이다. 눈으로 유명한 홋카이도에서 마세라티가 초대장을 보내왔다. 분명 기블리나, 콰트로 포르테 혹은 그란투리스모는 아닐 거다. 마세라티의 유일한 SUV 르반떼로 설원을 누비는 이벤트다. 더욱 기분 좋았던 소식은, 곧 국내에 론칭 예정인 르반떼의 최상위 버전 ‘트로페오’를 누구보다 먼저 타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늘에서 바라본 홋카이도는 도화지 같았다. 군데군데 높은 나무가 없었다면, 구름 위인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다. 무척 추웠다. 한국 날씨도 추웠는데, 이곳은 더 추웠다. 영하 5℃였지만, 우리를 행사장으로 안내한 담당 직원은 매우 따뜻한 날이라고 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은 오늘의 행사장에서 르반떼는 흩날리는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곳은 축구장 3개 정도를 붙여 놓은 크기다. 관계자들은 내리막과 언덕, 고속 주행 그리고 짧은 코너가 연속된 아기자기한 코스에서 트랙터를 이용해 눈을 다지고 있었다.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드디어 눈밭에서 르반떼를 즐기는 일만 남았다. 처음 코스는 고속 주행 코스. 차 한 대당 2랩을 돈다.준비된 모델은 트로페오, GTS 그리고 디젤 버전이다. 순차적으로 탑승하며 6바퀴를 돈다. 문제는, 눈밭에서 어떤 차를 몰더라도 그 힘을 다 쓸 수 없다는 데 있다. 출력이 낮은 순부터 차근차근 상위 버전을 타는 게 일반적이지만, 눈 위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나는 트로페오를 가장 먼저 타게 됐다. 출발 5분 전, 트로페오 앞을 서성이며 여기저기 훑어본다. 가장 큰 변화는, 좀 더 전투적으로 변한 범퍼, 보닛 위에 생긴 2개의 에어 벤트 그리고 휠사이즈(무려 22″)와 디자인이 다르다. 그리고, C필러에 자리 잡은 삼지창 배지에도 ‘TROFEO’라는 글씨가 박혀 있다. 트로페오는 이탈리아어로 ‘트로피’를 상징하는 단어다. 과거 모터스포츠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와 달리는 데 초점을 둔 모델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작명일 것이다. 사실 르반떼, 더 크게 보자면 마세라티가 국내 판매량이 치솟은 건 드라마 PPL 효과가 컸다. 업무에 찌들어 늦은 퇴근을 해도 <도깨비>라는 드라마로 인해 나는 피해를 봤었다. 뭐, 재미있게 드라마 하나 보는 거니 충분히 이해는 한다. 주인공이 타고 다닌 차가 르반떼였다. 그러고 보니 전면에서 바라보면 왠지 도깨비같이 생긴 거 같다. 아무튼, 드라마가 방영된 그해 마세라티의 국내 판매량은 2000대를 넘겼다. 참고로, 일본에서 마세라티의 한 해 판매량은 700~800대 정도다.

배기 사운드로 유명한 마세라티. 행사 담당자들은 그런 감성을 채워주고자 일부러 차에 시동을 걸어 놓지 않았다. 직접 버튼을 눌러 트로페오의 감성을 느껴보라는 취지다. 낮지만, 우렁찬 배기음이 테일 파이프를 통해 설원에 울려 퍼진다. 시트 포지션도 최대한 신경 써본다. 동승석에는 마세라티 본사에서 일본까지 날아온 인스트럭터가 탔다. 그런데, 낯이 익다. 그는 우리나라 인제에서 열린 페라리 행사 때 한국을 찾았던 인물이다. 그의 요구에 따라 최대한 부드럽게 가속하고 브레이크도 최대한 빠른 시점에 밟아 속도를 줄였다. 그런데, 너무 싱거웠다. 윈터 타이어만 신고 있다면, 어느 자동차도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인스트럭터는 안전을 위한 것이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며 웃어 보였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첫 번째 랩을 완주하기 전 이어진 긴 직선 코스에서 갑자기 속도를 올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가속 페달에 힘을 주기도 무서운 속도, 미끄러질 것같은 불안감에 두려움이 커졌다. 노면 굴곡에 따라 차가 움찔거리며 꼬리를 좌우로 흔드는 상황에서도 앞머리는 스티어링 휠 위치에 따라 눈보라를 일으켰다. 드디어 다가온 첫 번째 코너. 브레이크를 밟으면 과연 차체를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힘껏 밟았다. 바닥에 눈이 없다고 해도 믿을 만큼 몸이 앞쪽으로 쏠렸다. 타이트한 코너였지만, 트로페오는 앞머리를 깊숙이 쑤셔 넣은 채 눈길을 파헤쳤다.

분명 차가 미끄러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불안한 구석이 없다. 자세 제어 장치가 운전자도 모르게 차체를 진정시키며 각 휠에 정보를 빠르게 분석해 토크를 줄이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르반떼에 꼽힌 피렐리 스콜피온 타이어의 몫도 컸을 테다. 그렇긴 해도 너무 비상식적인 움직임이다. 590마력의 최고출력을 뿌리기 위해 직선 코스에서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아스팔트보다는 치고 나가는 맛은 덜하지만(참고로 트로페오의 공식 가속 성능 0→100km/h 기록은 3.9초다), 상체를 시트에 파묻기 충분한 힘이다. 4륜구동 시스템은 실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그립을 찾아 나선다. 트로페오는 르반떼 모델 중 유일하게 코르사 모드가 있지만, 그림의 떡이다. 노말 모드에서도 폭발적인 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코스에 적응한 후 GTS에 올랐다. 트로페오보다 40마력 낮긴 하지만, 550마력이다. 최대토크는 트로페오와 같다. 한 마디로, 이 녀석도 괴물이다. 코스에 익숙해졌고 믿음직한 동승자가 옆에 있었기에 처음부터 가속 페달을 깊이 밟았다. 뒤쪽이 약간 흐를 때도 카운터 스티어를 잘 쳐주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앞머리를 돌릴 수 있게 됐다. 코너를 탈출하며 일부러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더니 신세계가 펼쳐진다. 앞쪽을 보고 운전하는 게 아닌, 고개를 돌리고 사이드 윈도를 바라보며 카운터 스티어를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마인드 컨트롤에 실패하면 차는 돌아버리지만, 그런 상황은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코스 자체를 이런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에서 판매되는 르반떼 트로페오와 GTS 모두 우리나라와 같이 왼쪽에 스티어링 휠이 있다. 그런데, 디젤 버전은 오른쪽에 있다. 아무래도 판매량이 많지 않다 보니 좌우 모든 버전을 만들지 않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마지막 코스는 긴 내리막과 이어지는 언덕이다. 내리막을 질주하고 바로 언덕을 오르는 거라면 가능하겠지만, 핵심은 4륜구동 시스템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것이니 최대한 설명을 들어 본다. 우선, 내리막이 시작되기 전 스티어링 휠 왼편에 자리한 내리막 속도 제한 장치를 활성화 시키면 끝이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을 필요도 없이 설정된 속도에 맞춰 차는 속도를 유지한 채 기어간다. 물론, 속도를 높이면 그에 맞게 빨라진다. 사람도 서 있기 힘든 각도에서 이렇게 큰 덩치가 물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고양이처럼 아주 조금씩 움직인다.

그보다 더한 건, 오르막길을 정복하는 것이다. 빨리 올라가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곳에서 아주 느긋하게 4륜구동의 우수성을 느끼며 올라가 보란다. 그것도 중간에 선 다음, 다시 올라간다. 대단한 성능이다. 가속 페달을 무리하게 깊게 밟지만 않는다면, 성큼성큼 기어 올라간다. 너무 간단하게 올라가다 보니 얄미울 정도다.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었다. 항상 옆자리에서 친절히 설명해주던 바로 그 인스트럭터. 그는 랠리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베스트 드라이버다. 그가 운전하는 르반떼 옆자리에 앉아 코드라이버가 되는 것이다. 동승에 앞서 그는 컨디션을 확인한다며 혼자 떠났다. 출발부터 엄청나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은 듯 눈보라가 일었고 뒤쪽이 좌우로 요동쳤지만, 그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직접 운전할 때 코스가 길게만 느껴졌는데, 그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벌써 마지막 코스에 접어들었다.

동승석에 앉은 나는 소풍 가는 어린이처럼 들떴다. 랠리에서 우승한 드라이버 옆에서 설원을 누비는데 어느 누가 기쁘지 않겠는가.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여유가 묻어났다. 코너 진입 전 스티어링 휠과 브레이크를 이용해 드리프트에 유리한 자세를 만들고 부드럽게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듯 빠져나갔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 우렁찬 배기 사운드를 토해내며 설원을 누볐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르반떼의 4륜구동 시스템과 어떠한 조건에서도 차체를 잡아 세우는 브레이크 시스템, 그리고 탄탄한 섀시의 조화는 말 그대로 최고의 SUV였다. 눈길에서 이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는데, 아스팔트에서는 어떨까? 그래서 곧 국내 출시 예정인 트로페오가 더욱 기다려진다.

590마력의 최고출력으로 4초 미만의 가속 성능을 보여주며, 최고속도는 300km/h를 돌파한다. 거기에, 스포티한 주행에 최적화된 차체 균형감도 예술의 경지다. 마지막 자유 시승 시간. 르반떼 트로페오에 나만 앉아 코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두렵게 느껴지던 속도와 코너가 어느덧 친근하게 느껴지며 나도 모르게 가속 페달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다. 참가자 모두 전보다 빠른 속도로 설원을 달리고 있었다. 운전 실력을 갑자기 늘었을 리는 없다. 르반떼가 어떤 차인지 느낀 이상 모두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최재형